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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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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도 발전사

하수도 발전사 정보
연대 하수도발전사
BC 5000 메소포타미아, 바빌론 등에서 하수도 축조
BC 2000 크레타섬의 궁전에서 수세식 변소에 배수관접속
BC 2000 - 1400 중국 하남성 회양현에서 배수관 축조
BC 616 로마 하수도 축조
1350 년경 전유럽 페스트 유행
1388 영국 캠브리지에 도시위생법 제정
1606 파리에 최초의 하수 주간선 설치
1728 베르사이유 궁전에 최초의 수세변소 설치
1750 세느강에 하수 유입을 위한 개거식 하수도 축조
1810 영국 수세식 변소를 사용하기 시작
1842 독일 함부르크 하수도 축조
1848 런던 변소의 하수도 접속을 의무화함
1850 런던 콜레라 대유행
1855 미국 시카고 하수도 축조
1873 일본 긴자에 하수관 포설
1882 영국 미생물을 이용한 하수처리를 최초 실험
1918 영국 활성오니법의 하수처리장 설치
1948 미국 연방수질오염방지법 제정
1958 일본 하수도법 제정
1966.8.3 우리나라 하수도법 제정

우리나라의 하수도 역사와 현황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하수도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문헌을 살펴보면 조선시대까지 일반 가정오수는 노상과 저지대로 집수되어 구거를 통하여 하천으로 유입되거나 지하침투되었으나 1412년 청계천만은 왕도의 면목상 치수 및 준설공사를 시행하여 하천범람 방지를 위한 하수도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이를 우리나라 하수도의 시작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에서는 도성을 관통하는 청계 천의 개수, 준설만이 하수도사업의 전부였으나, 대한제국시대에 시가지 하수도사업으로 건설된 6,832m의 암거가 문헌상으로 하수도사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하천 및 관거에 대한 지속적인 유지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각 하천들은 분뇨와 오수로 뒤덮히거나 토사로 매몰되어 호우 또는 홍수시에 그 일대가 침수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하수도가 근대적 개념과 방법에 의하여 행하여진 최초의 하수도는 한일합병 후 1918년부터 1943년까지 총 사업비 475백만원을 투입하여 4차례에 걸쳐 총 225km의 간선 및 지선 하수도를 시가지의 범람 또는 하수의 정체, 오염 및 방류분뇨의 처분을 목적으로 하수도를 개량 또는 건설하였다. 그러나 도시의 인구집중이나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아니한 1960년 이전까지만 하여도 하수도는 도시 우수배제를 주목적으로 하는 도시가로 정비의 일환으로 건설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1,2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추진을 통하여 고도경제성장과 더불어 급속한 공업화, 도시화와 함께 생활수준 향상에 따른 생활양식이 개선되고 분뇨의 처리방식이 종래 수거식에서 수세식으로 변화되는 등 단위 오염부하량이 크게 늘어나 주요 하천의 수질오염이 문제가 되어 하수처리장 건설과 분류식 하수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일부 대규모 신시가지 조성시 분류식 하수도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976년 우리나라 최초의 하수종말처리장인 청계천 하수종말처리장이 1일 15만톤으로 건설된 이후 공공수역의 수질보전을 위하여 하수처리장 건설에 중점 투자한 결과 1995년말 현재 71개소에서 1일 9,653천톤의 하수를 처리하고 있으나,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된 하수관거 정비불량으로 하수의 누수 및 지하수 유입으로 하수처리장의 용량이 부족하게 되고 하수처리효율감소와 지하수 및 하천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어 개선대책이 시급한 실정이고 아울러 최근 하수 처리장이 혐오시설이란 인식을 개선하기 위하여 제도의 개선 및 시설운영 자동화 기술 및 환경친화적 시설의 선진기술의 개발보급에 힘쓰고 있다.
하수도의 체계적인 관리를 위하여 1966년 8월 3일 하수도법이 제정되었고 현재까지 51회에 걸쳐 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세계 하수도 역사

고대문명과 하수도

모헨죠 구로의 하수구

모헨죠 구로의 하수구 ▲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인 곳에 문명이 발생하였다. 홍수로부터 인명과 생활을 지키고(治水), 또는 음용수나 농경을 위한 관개용수로서 이용(利水)하는 등, 물과 사람은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
고대로부터 물을 다스리는 자가 나라를 다스린다라는 말이 있었던 것처럼, 물은 우리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편, 사람이 군집생활을 하면 배설물이 발생한다. 집락의 규모가 작을 때에는 배설물이 자연환경(環境容量)에 확산되어 사라지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집락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배설물을 배제하기 위한 시설로서 하수도가 필요하게 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하수도가 나타나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시대로, 많은 도시의 유적에서, 궁전으로부터 폐수를 하수도에 의해 배제하는 시스템이 발굴되었다.
이 시스템은 지금의 하수도에 매우 유사하며, 재료로는 가마에 구운 벽돌을 사용하였고, 그 기술도 놀라울 정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인더스 문명의 대표적인 도시인 모헨죠 구로에는 우수한 도시계획으로 집과 도로가 정확히 배치된 시가지가 형성되어, 도로옆을 따라 벽돌로 만들어진 하수구가 있으며(그림 1-1) 각각의 가정으로부터 벽돌이나 사기로 만들어진 관으로 접속되어 있다. 건물의 외측에 배치된 욕실이나 화장실로부터 배출된 오수는 하수구를 통하여 배제되어 넓은 거리의 하수구에 유입되어 윗물은 지하 침투에 의하여 처분되었다. 가로에 설치된 하수구는 사각형 단면으로 뚜껑으로 덮여져 있다. 로마에서는 우수한 기술로 많은 토목사업이 실시되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문구로 유명한 도로 건설, 석조의 대수도교 등 많은 시설이 있다.

하수도에 대해서는 기원전 616~578년에 축조된 크로악 맥심(최대의 巖居라는 의미)이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는데, 지금도 그 유적을 볼 수 있다.

중세 유럽과 전염병

중세에서는 교역이 활발하게 되어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모여 살게 되었다. 도시로의 인구집중은 위생환경을 악화시키는 결과가 되어, 때때로 유럽에서는 패스트 등의 전염병이 만연하게 되었다. 위생면에서도 암흑시대로 불리게 되어 전염병 등의 방지를 위한 하수도 정비는 거의 발전되지 못한 상태로 근세를 맞이하였다.

산업혁명과 근대 하수도의 시작

템즈강 하수도의 단면도

템즈강 하수도의 단면도 ▲

산업혁명은 생활활동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으며 이에 따라 도시의 인구는 더욱 급격히 증가해 공장이나 가정에서 배출되는 연기로 대기는 오염되고, 오수는 하천을 더욱 오염시켰다. 이와 같이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화의 물결과 이에 수반된 오염은 프랑스, 독일로 퍼져 갔다. 이제 유럽 전체가 심각한 환경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인도의 풍토병인 콜레라가 유럽에 침입해 큰 충격을 주었으며, 유럽에서 콜레라의 대유행은 1817년에 시작되어 몇 차례에 걸쳐 큰 피해를 입혔다.

런던의 테임즈강은 18세기에 들어서 오염이 보고되기 시작하였다. 런던의 인구는 1700년에 55만명, 1800년에 86만명, 1850년에는 급증하여 230만명, 1900년에는 650만명으로 팽창되었다. 오수는 감조하천인 테임즈강에 정체되어 악취를 발하였다. 1831년의 콜레라의 유행(런던에서 5만명 사망)은 하수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 1848년 공중위생법이 만들어 졌으나, 그 해와 그 다음해에 다시 콜레라의 대유행이 런던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 대책으로서 Joseph Bazargett은 테임즈강에 평행하게 복수의 하수도 간선을 부설하고, 런던 브리지의 하류 19km 지점에서 방류시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것이 현재의 런던 하수도의 기본인 테임즈강 차집관거 계획이다. 이 공사는 1875년에 총 연장 132km를 완성하였다. 이와 동시에 하천오염방지법(The River Pollution Control Act)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그 후의 인구증가는 계속되어서, 미처리된 오수를 방류하는 종래의 하수도 시스템으로 테임즈강의 수질을 개선한다는 것은 불충분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므로 오수와 우수를 배제하는 관거부설과 간역처리의 도입으로, 수질의 개선을 서서히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나 하수의 고도처리가 실시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였다.

파리의 하수도는 19세기까지는 로마시대의 유산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콜레라의 유행은 파리에서도 하수도 건설의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 3세하의 오스만에 의하여 도시계획이 수립되어 이에 근거한 상하수도가 계획되었다. 파리의 하수도는 당초 분뇨를 유입시키지 않도록 계획되었으나 그 후에 물 사용량의 증대나 수세식 변소의 보급에 의해 1880년 분뇨를 하수도에 유입시키기로 하였다. 파리의 하수도는 하수, 우수와 가로의 먼지도 제거시키며, 또한 쉽게 청소할 수 있는 대하수거가 건설된 것이 특징이며,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로 유명하다. 수집된 하수는 교외에 있는 넓은 농지에 관로를 통하여 보내어 관개처리 하였다. 현재는 이 용지는 활성슬러지 처리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영국을 따라서 함부르크의 하수도 계획이 처음으로 수립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팻텐코파와 콧호, 두 훌륭한 의학자에 의하여 콜레라 등의 전염병 대책으로의 수도와 하수도중 어느 쪽에 중점을 둘 것인가에 대하여 토론을 벌인 결과, 결과적으로 독일에서는 상, 하수도를 병행하여 진행시키로 하였으며, 이에 따라 위생환경이 향상 되었다.

생물처리 기술의 등장

하수처리 기술의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나라는 영국이다. 공장폐수에 의한 손해배상 문제, 음료수의 오염에 대한 소송 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1860~1870년에 걸쳐서 하수정화에 대한 위원회가 설립되고, 이에 대한 검토가 있었다. 영국에서는 이미 1855년경에 약품을 사용한 하수처리의 실례를 볼 수 있었다.

화학처리(약품침전)는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과, 처리 후 많은 양의 슬러지가 발생한다는 것 등, 대량의 하수를 처리하기에는 부적합한 점이 많아 생물처리 방식으로 바뀌어 갔다. 그 후 미국의 로렌스 연구소에서 살수여상법이 개발되어(1891년 경), 실제적인 생물처리법으로 보급되어 갔다.

또한 파울의 조언을 받아서 아단과 로켓 방식에 의한 본격적인 활성슬러지 처리시설이 1918년 영국의 위진톤에서 운전을 개시하였다. 이 기술들은 명치정부의 외국인 고용기사 또는 유학생에 의해 일본에 소개되어, 1922년에 일본 최초의 하수처리장인 동경의 삼하도 처리장에 살수여상 시설이 가동되었다. 또 1924년에는 나고야시의 열전처리장에서 활성슬러지법의 실험에 착수하였다. 활성슬러지법의 발명은 수처리 역사 중에 획기적인 것으로, 이들 생물처리법은 오늘날까지 도시 하수처리의 주역이 되고 있다.

일본 하수도의 역사와 현황

일본은 예로부터 농경생활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도시의 발전이 구미제국에 비하여 무척 늦었지만 강호시대 말기에 있어서 강호나 대판(大阪)의 번영은 세계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토가 아름답고 물이 깨끗한 이유 중 하나는 분뇨가 비료로서 회수되어 농촌에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즉, 분뇨는 자연으로 순환이용되어 배출되지 않았고, 배출된 오염물은 자연의 자정능력의 범위 안에 있었던 것이다.

고대도시 - 평안시대

일본에서 정착생활이 시작되어 큰 부락이 형성된 것은 벼농사에 의한 농경이 시작된 야요히시대 이후로 생각된다. 이 시대에는 벼농사기술의 전래에 따라 논이 개발되어 인공적인 수로가 만들어졌다.

서기 694년, 중국의 장안(長安)을 모방한 등원경(藤原京)이 일본 최초의 계획도시로 건설되었다. 그 후 정권이 바뀜에 따라 평성경(平城京), 장강경(長岡京), 평안경(平安京)으로 천도되었으나 이들 도시는 바둑판 모양으로 시가지가 구획되어 도로변에는 배수로가 정비되어 도시전역을 망라하는 배수 시스템이 형성되었다.

무가시대 - 강호까지

겸창막부의 탄생으로 고대로부터 전통적인 지배체제가 붕괴되어 전투집단인 무사가 지배하는 체제가 시작되었다. 이때까지의 중앙 집권적인 절대권력에 중점을 두어 계획되었기 때문에 생활환경을 고려한 도시계획은 찾아 볼 수 없다.

분뇨의 경지환원이 시작된 것은 겸창시대이며, 이때 시가지의 폐기물을 농업생산에 이용한 재환원 시스템(recycle system)은 이 후 일본의 고유의 것으로 오늘날까지 계속 되었다.

전국시대말에 대명달(大名達)은 국력을 키우기 위해 자기 영토의 경영에 전력하였고, 성하(城下)도시는 상공업자가 모인 물류의 중심과 소비지를 겸하여 수상운행이 편리한 선상지나 하구에 입지하게 되었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은 대판(大阪)에 거점을 정하였다. 이 지역은 정천(淀川)과 대화천(大和川)에 의해 형성된 삼각주 지대이며 원래 배수상태가 좋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운하가 개발되었으며, 도로에 접한 건물의 뒷면에는 택지배수를 수용하는 배수구가 만들어졌고 그 끝은 운하에 접속되었다. 배수구는 대판(大阪)의 성장과 더불어 건설되어 강호시대에 가장 많이 건설되었다. 이들 시설의 일부는 전후까지 사용되었다.

강호는 대전도관(大田道灌)이 축성함으로써 시작하였으며, 원래 배수가 잘 안되는 소택지이어서 침수가 반복되었다고 한다. 강호의 도시계획에서는 우선 운하를 개발하고 배수시설을 정비하여, 배수구의 다른 형태의 하수도가 도시의 형상에 따라서 만들어졌다. 강호는 정치, 경제의 중심으로 번영하여 세계 최대의 번화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가호 주민의 식량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넓은 종지가 경작되었으며, 식량 증산에 필요한 비료로서 강호시의 분료를 고가에 매입하여 농촌에 보내는 합리적인 시스템이 형성되었다. 하수는 전적으로 배수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나 시가지의 확대와 인구집중에 의하여 생활환경이 악화되고, 강호시대에도 말기에는 전염병이나 침수피해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근대 하수도의 시작 - 명치유신

명치유신 이후 부국강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산업이 발전되었으며, 이에 따라 도시로의 인구집중에 의한 도시지역의 오염물 발생이 급격히 증가되고 시가지의 확대에 따라 생활환경의 정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근대 하수도의 선구는 개국과 동시에 횡빈(橫浜), 신호(神戶)에 건설된 외국인 거주지의 하수도 시설과 긴좌렝가의 서구풍의 하수거이다. 이 시설들은 한정된 지역에 설치된 것이지만, 외국인 고용기사의 손에 의하여 근대 기술이 도입되고 이에 따른 재료, 시공 등의 관련기술이 발전되었다고 평가된다.
단, 구미를 따라가 추월하자는 구호와 더불어 군사 및 산업 방면에 주력하는 반면, 도시환경의 악화에 대한 사회기반 정비의 일환으로서의 공중위생의 향상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일본의 공중위생 향상에 일생을 바친 장여전재(長与專齋)는 1871년~1873년의 사절단의 일원으로 구미제국을 조사하던 중에 영국에서 템즈강 차집관거의 완성, 프랑스에서는 하수도에 분뇨를 유입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쟁, 독일에서는 패튼코퍼의 지도에 따라 시행된 분뇨가 유입되는 하수도의 정비 등에 대하여 견문을 쌓을 수 있었고, 도시의 상하수도를 비롯하여 위생시설 정비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 후 일본 궁중위생학의 선구자로서 하수도의 발전에 주력하였다. 1877년~1879년에 발생한 전국적인 콜레라의 유행을 통하여 17만명의 환자가 발생 하였으며 이 중 11만명이 사망하였다.

정부는 장여(長与)를 중심으로 수도의 보급과 하수도의 건설을 계획하였고, 그 일환으로 동경 신전(神田)에 실험적으로 하수도를 건설하기로 하였다. 화란인 테레케의 지도하에 석흑오십이(石黑五十二)의 설계에 의하여 1884년~1885년 신전(神田)에 하수도가 건설되었다.

이 사업에서 동경의 신전(神田)구역에 지관은 분류식, 본관은 합류식으로 계획하여 2년간 총연장 4,030m를 시공하였으나, 재정상의 이유로 1886년 사업을 중단하였다. 일본의 근대 하수도는 이 신전(神田)하수도가 시작이었다. 이 기술수준은 높이 평가되었으며 당시 시설의 일부는 현재도 사용 중이다.

그 이후 동경의 도시계획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동경시구개정조례」의 제정에 의하여 하수도의 논의가 재개되어, 1888년에는 상수하수 건설조사의 실시가 결정되었다. 이 조사의 중심 역할을 영국인 기사 발돈이 하였다. 발돈은 시구개정위원회에서 상수하수 설계 조사위원 주임으로서 동경시의 하수도 계획을 종합하였고 이후 대판(大阪), 명고옥(名古屋), 광도(廣島), 하관(下關), 선태(仙台) 등의 계획에 착수하는 등 전국적 으로 활약하였다.

발돈은 장여(長与) 등과 1889년 「동경 하수도 설계 제1차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는 15개 구를 대상으로 3계통으로 분할하여 오수와 우수를 분리하여 배제 하는 분류식을 채용하고, 분뇨는 종래와 같이 수거하여 처리하고 하수도에 유입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3계통의 하나인 황천(荒川)에 방류하는 제 2 노선에 대해서는 삼하도(三河島) 지내에 펌프장을 설치하여 간헐 사여과를 병행하여 처리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다만 정부가 재정난으로 상수개량공사를 먼저 시행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이 하수도계획은 실시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과정 중에 대판(大阪)에서는 1894년에서 1901년까지 시 중앙부 하수도 개량 공사를 실시하고, 총연장 22만m의 관거를 개축 또는 부설하였다.

1900년에는 「하수도법」이 「오물소제법」과 동시에 제정되었다. 오물소제법이 진개, 슬러지, 오수, 분뇨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법인 것에 비하여 하수도법은 오수만을 대상으로, 토지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공적으로 하수도를 설치하고 주민에게 사용료를 부담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동경시에서는 1898년 상수도 개량이 거의 완료되었으며, 다음 해부터 하수도 개량사업에 착수하기 위하여 예비조사를 개시하였다. 1908년에는 현재 동경하수도계획의 원형인「동경시 하수도설계」가 인가되었다. 이 계획의 특징은 중도예치(中島銳治)를 비롯한 일본인 기술자에 의하여 발돈이 계획한 분류식을 개량하여 우수배제에 중점을 둔 합류식을 제안하였다는 것이다. 이 후 일본의 주요 도시에서는 거의 합류식을 채택하였다. 수도 동경의 하수도는 본 계획에 따라서 실시되어 1922년에 일본 최초의 하수처리시설(살수여상)이 삼하도(三河島)에서 운전을 개시하였다.

1897년대까지 하수도를 건설한 도시는 동경(東京), 대판(大阪), 선태(先台) 등 겨우 세 도시였으나 1907년대 이후는 도시화의 진행에 따라 하수도를 건설하는 도시의 수가 점차로 증가하여 신호(神戶), 함관(函館), 광도(廣島), 명거옥(名古屋), 강산(岡山) 등의 도시가 하수도사업에 착수하였다. 이 사업의 목적은 물론 환경위생의 향상에 있었으나 특히 시가지의 개발에 따라서 재래 우수배제시설의 용량이 부족해 졌으며, 이에 따른 침수의 방제가 사업의 주된 목적이었다.

정체기에서 새로운 하수도법의 제정까지

하수도의 정비에는 거액의 비용이 필요하다. 따라서 부국강병책하의 산업우선 시대에 있어서 하수도 건설에 착수한 도시는 일부 한정된 도시 뿐이었다. 환경정비면에서는 상수도 보급에 역점을 두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및 전후 복구기를 통하여 하수도 사업은 거의 진전되지 못하였다.

1955년에는 구하수도법(1900년 제정)을 근본적으로 개정한 새로운 하수도법이 발효되었다. 이 새로운 하수도법의 목적은 「도시환경의 개선을 도모하고, 도시의 건전한 발전과 공중위생에 기여함」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지방을 포함한 많은 도시가 하수도사업을 개시하였으나 주로 도시지역의 침수방지와 생활환경의 정비에 중점을 두고 사업이 진행되었다.

수질보전과 새로운 하수도법의 필요성

경제성장과 산업의 발전이 활발히 진행되는 가운데 전국 각지에 심각한 수질오염 문제가 발생되었다. 이 오염의 원인은 인구집중에 의한 가정하수와 공장폐수의 배출이었다. 이에 대하여 공장폐수의 배출규제와 하수도 정비는 수질보전의 중요한 시책으로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공공수역의 수질보전을 위한 하수도의 역할은 1967년의 공해대책기본법과 이 법에 의한 환경기준의 제정에 이어서 1970년에 제정된 「수질오염방지법」과 「하수도법의 개정」에서 강조되었다. 그 후에 수질보전의 관점에서 하수도의 역할은 비약적으로 커졌으며, 수계의 수질종합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유역별 하수도정비 종합계획의 책정, 농어촌이나 관광지의 하수도 정비를 목적으로 한 특정환경보전 하수도의 제정, 호소나 만 등의 폐쇄성 수역을 대상으로 한 부영양화 대책과 총량규제의 도입 등 지역의 특성에 따른 하수도 정비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장래에는 지역의 물 순환(cycle)의 중요 시설로서 하수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되며, 하수 처리수의 재이용에 의한 수자원의 유효이용과 도시의 괘적한 환경 조성 등 하수도의 역할은 점점 다양화되리라 판단된다.

프랑스 하수도의 역사와 현황

B. C. 2세기에 로마제국이 파리까지 그 판도를 넓혔을 때 파리거리에 개거식의 하수도를 설치하였지만, 그 후 이 하수도에 쓰레기가 쌓여져 있었고, 1531년에 가정용 화장실의 설치가 의무화되어 화장실의 배수구가 개거식의 하수도에 연결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불결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1808년경에는 20km 이상의 하수거가 영국것을 모방해서 근대적 하수도로써 축조되었지만, 하수는 하천에 방류되었다. 1832년에 콜레라가 유행하여 1833년부터 40년에 걸쳐 체계적인 하수도의 건설에 착수했다. 이 하수도는 현재도 여전히 유명한 파리의 대하수도로 오수, 우수 외에 거리의 쓰레기도 배제하는 데 쓰여져, 하수외에 상수도관, 압축 공기관, 전기 케이블 등의 지하 매설물을 수용하는 폭 6m, 높이 5m의 대단면으로, 간선부는 작은 배를 띄워서 청소관리를 함은 물론, 외부사람도 유람을 함께 할 정도로 되어 있다.

1880년의 법률에 의해 분뇨를 하수구에 방류하는 것이 허가되었으며, 1913년에 파리 교외의 코롬프에서 최초로 살수 여상법에 의한 하수처리가 시작되었다.

영국 하수도의 역사와 현황

1531년, 영국에서는 빗물의 배제를 위해 토지의 주인으로 하여금 하수구(도랑)의 청소를 의무화하는 하수법이 제정되어 런던 등에서 국부적으로 하수도를 설치했지만,그 당시는 주로 개거이었으므로 분뇨를 방류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당시, 화장실은 오물통(cesspool)이 사용되어져 분뇨의 일부는 저장되고 일부는 땅 속으로 침투되도록 만들어졌지만 1775~1778년(1810년경이라는 설도 있다)에 수세식 화장실(water closet)이 발명되어, 화장실의 오수는 오물통에 집결되어 저장되었다.

그러나 양이 많아서 저장하는 것이 곤란하게 되어, 1815년에 오물통으로부터 직접 하수거에 방류하는 것을 허가했다. 그것에 의해 가정 내에 오물이 쌓이는 일은 없게 되었지만, 일반하수와 함께 분뇨가 템스강에 방류되어, 뚜껑 없는 하수거는 비위생적이 되었다. 1831년에 콜레라가 유행함에 따라 하수도의 유용성이 인식되어 1842년 보건법(Public Health Act)에 의해 하수도를 촉진시켰다.

1847년에는 모든 하수거에 뚜껑을 덮도록 하였고, 1848년에는 공중 위생법이 제정되어 모든 오물통을 폐지하고, 오수를 하수도에 방류하도록 해서 런던에서 처음으로 근대식 하수도가 시작되었다. 이후 수세식 화장실과 하수도가 전세계에 보급 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시와 공업이 급격하게 발달한 영국에서 하수도의 정비가 되어감에 따라서, 하수를 받아들이고 있는 템스강의 수질오탁 정도는 차츰 심해져 악취가 나고 미관을 해칠 뿐 아니라 상수원으로서 혹은 낚시, 수영 등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1849년에 총연장 160km의 차집간선(遮集幹線)을 만들어 1875년에 새로 공중 위생법, 1876년에 하천오탁 방지법이 제정되었으며, 1882년에 하수의 약품 침전처리가 제안되어, 1887년에 두 곳의 하수 처리장이 생겼다. 1910년 이후, 템스강의 오탁이 급속히 진행되어 1951년에 재차 하천오탁 방지법을 개정했지만, 1948년에 발족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32개소의 하천국(river authority)에 의해 광역 하수도의 건설을 촉진하고 유지관리에 충실을 기했다. 1961년과 1963년에 하천오탁 방지법을 개정, 수자원법(Water Resources Act)의 제정에 의해 거듭 개선된 후, 1974년에 이르러 물에 관련된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이 행해졌다. 이것은 종래 수량과 수질 등의 관리를 지방 공공단체나 지역과 관계없이 실시해 왔던 하천국을 개조해서 10개소의 종합지역 수정청(Water Authority)을 설치하여, 하수처리와 치수, 이수, 레크레이션등을 유역 단위로 종합적인 물관리 행정을 하도록 하고 있다.

독일 하수도의 역사와 현황

독일에서의 하수도는 1842년에 영국의 Lindley에 의해 함부르크에 건설되었다.
하수관거의 단면은 경사와 하수량을 계산하고 청소와 환기를 고려해서 시공방법과 재료를 선택한 것으로, 이것을 기초로 독일의 하수도 기술이 발달하였다. 함부르크의 하수도는 1842년의 대화재 이후 불에 유실된 구역부터 실시하여 점차 확장해서 엘베강 우안에 전체 하수를 차집해서 도시의 하류로 방류하는 계획으로 되어 있다. 베를린은 1856년경 독일인 Hobrecht의 계획에 의해, 시를 여러 개의 배수구역으로 나누어 여기저기 독립된 하수도망을 가진 부채꼴 모양으로 배열하고, 저지대에 펌프장을 설치해 증기의 힘에 의해 하수를 주변 관개지로 보냈다. 중심부는 1876~1882년에 완성되었지만, 독일의 대부분의 도시는 1880~1890년에 하수도를 설치했다.

분뇨의 처분은 운반식이냐 물로 씻어내리느냐(수운식)의 논의가 있었지만, 가장 위생적인 해결방법은 수세식 화장실에 의한 수운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대부분을 분류식 하수도로써 채용했던 독일 최초의 도시는 Elberfeld-Barmen으로서 1902~1907년에 오수거와 우수거를 따로따로 설치하였다.

독일식 하수도 관리의 특색은 1904년에 엠샤 물관리 조합(Emschergenossen schaft)이 설치되어 엠샤강 유역의 일부분에 대해 이수와 배수를 일괄해서 관리하는 운영방식을 가진 것으로, 1913년에는 루르 물관리 조합(Ruhrverband)이, 1926년에는 라포 물 관리 조합(Lipperverband)이 설립되어 현재 8개 조합이 조직되어 있다.

미국 하수도의 역사와 현황

초기의 하수도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1801년에 필라델피아에 설치된 하수도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잇다. 1857년에 뉴욕의 브룩클린은 Adams에 의해, 1858년에 시카고는 Chesbrough의 설계에 의해 하수도가 설치되어 1860년에 12개 주요도시에 공공 하수도가 설치 되었다. 하수거는 초기의 유럽과 같은 양식으로 빗물배제를 위해서 만들어졌고, 분뇨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보스턴에서 1833년 이후 분뇨를 접속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영국과 같은 양식으로 분류식이 크게 연구되었지만, 영구의 경우는 횟수가 많지만 강도가 작은데 반해, 미국에서는 횟수가 적지만 강도가 크다는 강우 특성의 차이가 있어, 합류식 하수거 내의 청소는 강우에 의해 충분히 기대될 수 있었다. 그래서 지표배수가 비교적 용이하게 이루어지는 지역에서는 우선 분류식을 채용해서 오수거를 만들고, 우수거는 나중에 건설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합류식, 분류식 모두 채용되어 있지만 수질오탁 방지와 경제성의 관점에서 계속 논의되고 있다.

미국에서 특히 눈여겨 볼 사항은 1948년과 1956년에 수질오탁 방지법의 관점에서 법률이 제정되었으며, 특히 1972년에는 획기적인 연방 수질오탁 방지법 수정안(Water Pollution Control Act Amendments. 1972)이 제정된 것이다. 이것은 전국의 수역을 생물의 서식에 충분한 청정도를 유지하고, 레크레이션을 할 수 있는 수질로 정화하기 위해 오수의 2차 처리 또는 고도처리를 하고, 오염물을 방출하지 않도록 하는 이른바 zero discharge에 필요한 강력한 조치를 강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1977년에는 1972년의 법을 대폭 개정해서 청정수법(Clean Water Act, 1977)을 제정해서 실정에 입각한 효과적인 시책을 진전시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