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활자인쇄술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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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활자인쇄술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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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원자

서적원자는 조선 태조 4(1395)년에 백주지사(白州知事) 서찬(徐贊)이 활자를 만들어 서적원에 바친 목활자로 <서찬자>라고도 한다. 활자의 크기나 자수는 알 수 없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자 관제를 고려의 제도대로 답습하여 문적(文籍)과 도서(圖書)를 관장하는 교서관(校書館)과 고려 말기에 부활된 서적원(書籍院)을 설치하고 주자인쇄업무를 담당하는 영(令)과 승(丞)의 직책까지 두었다.

그러나 당시는 왕조 교체의 혼란기라 서적원에서 제대로 인쇄업무를 감당하지 못하였던 듯하다. 그 결과 태조 4(1395)년에 백주지사 서찬이 목활자를 만들어 서적원에 바치자 건국 초에 절실히 필요했던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100여 부를 간행하여 반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서적원자는 [대명률직해] 외에도 당시 필요했던 여러 가지 서적들을 간행하였으리라 여겨지나 그에 관한 기록이나 인본들이 전해지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서적원자는 조선 건국 초에 서적원이 활자 인쇄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을 때 지방관서에서 만들어 바친 목활자로 당시 필요했던 서적을 간행하여 보급하였다는 점에서 인쇄문화사적으로 의의가 큰 것이다.

녹권자

녹권자는 조선 태조 4(1395)년에서 태조 6(1397)년 사이에 사급된 녹권의 인출에 사용된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0×1.2㎝, 소자 0.8×1.0㎝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태조 원(1392)년 7월에 조선을 개국하면서 공신도감(功臣都監)을 설치하고 8월 2일부터 개국공신(開國功臣)들에게 녹권(錄券)과 교서(敎書)를 그리고 10월부터는 원종공신(原從功臣)들에게 녹권을 내려 논공행상을 하였다.

태조 원(1392)년 이화(李和)에게 사급한 [개국공신녹권]과 동왕 4(1395)년 정진(鄭津)·김회련(金懷鍊)·장관(張寬)·김천리(金天理) 등에게 사급한 [원종공신녹권]은 모두 필사였다. 이들 녹권은 동일한 본문 내용을 수급자들에게 서식을 주고 써오게 한 것이었다.

글씨체가 서로 다르고 글자수도 차이가 있으며 글자를 잘못 쓰고 누락시킨 것이 적지 않아 이를 바로잡은 다음 <이조지인(吏曹之印)>을 일일이 찍었기 때문에 녹권 전체가 조잡하고 지저분한 편이었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태조 4(1395)년에 사급한 녹권부터는 목판인쇄와 목활자인쇄를 병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전래본으로 이원길(李原吉)에게 사급한 [원종공신녹권]과 사급자를 실명한 [원종공신녹권] 및 한노개(韓奴介)에게 사급한 [원종공신녹권] 등이 있는데, 녹권의 끝에 표시된 글자가 작고 총총한 공신도감 인원의 명단은 목판인쇄이고 그 밖의 본문은 모두 목활자로 간행된 것이다.

태조 6(1397)년에 심지백(沈之伯)에게 사급한 [원종공신녹권]에 이르러서는 녹권문 전체를 목활자로 간행해내는 단계로 발전하였다. 녹권자는 활자를 만든 솜씨가 치졸하여 활자모양과 자획이 가지런하지 않고 인쇄가 조잡한 편이나,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목활자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귀중하게 평가되고 있다.

[동국정운]자

[동국정운]자는 세종 29(1447)년에 [홍무정운(洪武正韻)]의 우리나라 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 편찬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간행하는 데에 사용된 한자와 한글의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1.8×1.6㎝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신숙주(申叔舟) 등 여러 학자들이 임금의 명으로 세종 29(1447)년 9월에 <훈민정음(訓民正音)> 제정의 원리와 배경연구에 매우 긴요한 자료인 [동국정운]을 완성하자, 다음해인 세종 30(1448)년 11월에 목활자로 간행하여 각도를 비롯한 성균관(成均館) 사부학당(四部學堂) 등에 나누어 주었다.

서문의 대자와 본문 대자에 운을 단 소자는 <초주갑인자>의 대자와 소자가 사용되었다. 대자는 진양대군(晉陽大君)의 글씨를 자본으로 하여 새김이 정교하며, 둥근 필의가 예리하게 잘 나타나 있고 인쇄도 깨끗하다.

[홍무정운]자

[홍무정운]자는 단종 3(1455)년에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의 간행에 사용된 한자와 한글의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1.8×1.5㎝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다음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 잡고자 세종 29(1447)년에 [동국정운]을 완성하고 다시 한자의 중국음을 정확히 나타내기 위해 당시 명나라에서 새로 엮은 [홍무정운(洪武正韻)]의 음을 한글로 표기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사람을 요동에 보내 정확한 음운을 결정하고 또 명나라 사신을 접견할 때마다 중국음을 연구하게 하였는데, 그 작업이 세종 때 완료되지 못하고 문종 때 교열을 거쳐 단종 3(1455)년에 [홍무정운역훈]을 간행하였다.

이 서적을 간행하는 데에 쓰인 한자대자를 <홍무정운자>라 한다. 한자 소자는 <초주 갑인자>가 사용되었다. [홍무정운]자는 [동국정운]자를 방불케 하나, 활자의 제작기법의 수준은 떨어지는 편이다.

을유자체 목활자

을유자체 목활자는 세조 때에 호불정책과 불서간인 사업의 촉진에 영향을 받아 을유자체를 닮게 만들어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을 비롯한 장소류(章疏類)의 불서를 인출하는데 사용된 활자로 <을유자체 사찰자>라고도 한다.

활자의 크기는 1.0×1.0㎝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활자를 제작한 사찰과 시기 그리고 만들어진 경위에 관한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글자체를 을유자와 닮게 만든 점으로 미루어 15세기 후반 무렵에 제작된 듯하다. 이 목활자는 하나씩 손으로 새겨 을유자에 비하면 글자의 크기와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자획도 가지런하지 않으나 먹색의 진함과 인쇄의 선명도는 을유자보다 나은 편이다.

을유자체 목활자본을 <고려금속활자본> 또는 <고려주자본>으로 인식한 적이 있어 감식에 각별한 유념이 필요하다.

인경자

인경자는 연군산 때에 불경을 인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한자와 한글의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1.4×1.9㎝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성종이 승하하자 대비들이 임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연산군 원(1495)년 원각사(圓覺寺)에서 대대적으로 불경을 간행하였으며 동일한 내용의 단일 발문을 목활자로 간행하여 모든 서적의 끝에 똑같이 붙였다.

다음해인 연산군 2(1496)년에는 임금이 내탕(內帑)으로 불경의 간인 사업을 도와 목활자를 더 만들어 한자본 [천지명양수륙잡문(天地冥陽水陸雜文)]을 간행하였고, 이어 국역본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과 [진언권공(眞言勸供)]을 정교하게 간행해냈다.

이들 인본은 성종의 계비인 정현대비(貞顯大妃)와 덕종(德宗)의 비인 인수대왕대비(仁粹大王大妃)가 주관하여 임금이 내주는 내탕(內帑)으로 정성껏 활자를 만들어 간행한 것이며 그 일을 실제로 맡아 진행시킨 이는 학조(學祖)였다. 자체는 바르고 깨끗한 필서체이고 새김이 정교하여 활자모양이 단정하고 가지런하며 인쇄도 먹색이 진하고 깨끗하여 인본들은 매우 정교하고 우아하다.

금성자

금성자(錦城字)는 중종 때의 관리이자 학자였던 김정국(金正國·1485∼1541)이 [성리대전서절요]의 간행에 사용한 목활자로 이를 <나주자(羅州字)>이라고도 한다.

활자의 크기는 1.0×1.2㎝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중종 33(1538)년 여름 김정국이 호남관찰사로 부임해가서 도사(都事) 김회백(金晦伯)과 함께 의논하던 중 금성(錦城)에 목활자가 있으나 부족하고 이지러진 활자가 많음을 알고 이를 새로 보충한 다음 자신이 간추려서 엮은 4권본 [성리대전서절요(性理大全書節要)] 400부를 간행하였다.

나주에서는 일찍부터 목활자를 만들어 서적을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임진왜란 후에도 목활자를 만들어 서적을 간행한 바 있었다. 금성자는 을해자 계열을 닮게 쓴 필서체이며 활자의 새김은 비교적 정교하나 [성리대전서절요]를 간행할 때 보충한 보자는 새김이 거친 편이나 지방관서에서 목활자를 만들어 서적을 간행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호음자

호음자(湖陰字)는 명종 때 대제학을 지낸 고관이자 학자인 정사룡(鄭士龍·1491∼1570)이 그의 문집 [호음잡고(湖陰雜稿)]의 간행을 위하여 사사로이 만든 필서체 목활자로 이를 <정사룡자>라고도 한다. 활자의 크기는 1.3×1.4㎝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글자체가 바르고 깨끗한 필서체이고 새김이 정교하다. 활자를 만든 솜씨가 정교하여 동활자로 보는 이도 있으나 같은 글자의 모양이 서로 다르고 자획에 새김의 자국이 예리하게 나타나고 있는 점에서 목활자임이 틀림없다. 이 활자는 당시 사가활자 인쇄술의 발달수준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추향당자

추향당자(秋香堂字)는 16세기 후반에 갑진자체(甲辰字體)를 닮게 만든 목활자로 <기성자(箕城字)>라고도 한다. 활자의 크기는 중자 1.0×0.8㎝이고 소자 0.5×04㎝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이 활자로 인출된 [자경편(自警編)]의 인기에는 광해군 원(1609)년 봄에 기성의 추향당에서 활자로 간행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기성은 기영(箕營)으로 평양의 옛 이름의 하나이며, 추향당은 평양감사를 지낸 이계맹(李繼孟·1458∼1523)이 본영 안에 세운 별채 건물이다.

[자경편]에서 마멸된 활자가 적지 않고 보자가 혼용되고 있어 만든 지 오래된 활자인 듯하며, 활자의 조성시기는 활자의 마멸과 보자의 정도로 미루어 임진왜란 전의 16세기 후반 무렵인 듯하다.

[효경]대자

효경대자(孝經大字)는 [효경대의]의 간행에 사용된 대자의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2.8×3.0㎝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선조 18(1585)년에 경서(經書)의 국역과 교정을 위해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유신을 선발하여 먼저 [소학]의 번역과 교정부터 착수하였으며 이어 [대학언해], [중용언해], [논어언해], [맹자언해] 등의 사서와 [효경언해]를 번역·교정해서 <을해자체 경서자>로 선조 20(1587)년에 간행하기 시작하여, 동왕 21(1588)년부터 23(1590)년 사이에 나누어 주었다. [효경언해]와 [효경대의]를 합부(合部)하여 간행한 것으로 효경대자의 자체는 송설체계의 부드러운 둥근 필의인 것이 특징이며 새김이 정교하여 필체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효경대자는 선조 22(만력 17·1589)년 6월에 무렵 [효경대의]를 홍문관에 내려 한글로 번역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알 수 있게 하라는 왕명이 내려진 점과 국역이 선조 23(1590)년에 완성되어 9월에 내사할 때 합부 형식으로 반사된 점을 고려할 때 선조 23년에 만들어진 듯하다.

기타 임진란 이전 목활자

임진왜란 이전의 16세기에는 전국의 여러 곳에서 목활자를 만들어 서적을 다양하게 간행해 냈으나 기록이나 실물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활자의 내력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문헌기록에는 서울을 비롯한 지방의 주요 도시에서 활자를 만들어 서적을 간행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영천(永川)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서천(舒川)의 명곡서원(鳴谷書院), 성주(星州)의 영봉서원(迎鳳書院) 등에서는 활자를 만들거나 빌려서 서적을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임고서원에서는 명종 16(1561)년 5월 병자자체 목활자를 빌려 [회암서절요(晦菴書節要)]를 간행하였고 명곡서원에서는 선조 14(1581)년에 [표제구해공자가어(標題句解孔子家語)]와 [신간소왕사기(新刊素王事記)] 등을 간행하였는데 권말에는 목활자를 새긴 각수의 이름을 비롯한 인출자·교정자 및 간행사항을 표시하고 있다.

활자는 갑진자체를 닮게 만든 목활자이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전신인 영봉서원에서는 16세기 후반 무렵에 을해자체 목활자로 [영봉서원기(迎鳳書院記)]를 간행하였다. 16세기에 을해자의 소자체를 닮게 만든 목활자는 주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유생들을 위해 휴대용 소형 서적을 간행해내는데 사용되었는데, 누가 어디서 활자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을유자의 소자체를 닮게 만든 목활자로 인출된 서적으로는 [송원사략(宋元史略)]이 전래되고 있다.

훈련도감자

임진왜란 직후 선조 27(1594)년 2월에 훈련도감이 설치되었으나 선조 30(1597)년의 정유재란으로 훈련도감의 운영은 난관에 봉착하여 양병의 유지가 매우 어려웠다.

그간 운영비를 조달하기 위해 둔전법(屯田法)을 실시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자급자족이 어려웠다. 그 결과 강구된 것이 훈련도감의 유휴병력을 이용하여 활자를 만들어 교서관(校書館)을 대신하여 서적을 인출해주고 실비를 받아 경비의 부족을 충당하는 일이었다.

당시 인쇄업무는 흩어진 옛 활자를 수습하고 부족한 것을 목활자로 보충하여 아주 긴요한 것만을 겨우 간행해내는 실정이어서 훈련도감에서 대대적인 인쇄사업을 실시하여 운영비의 일부를 충당하려는 것은 시의에 적절한 사업이었다.
훈련도감의 인쇄사업은 선조 말기부터 시작되어 광해군 시대를 거쳐 인조 후기(17세기 전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에 훈련도감은 옛 활자의 글자체를 본뜬 각종 목활자를 만들어 다양하게 서적을 간행해냈는데 이들 활자는 <훈련도감자(訓練都監字)>라 총칭하기도 하나 구체적으로 <갑인자체 훈련도감자>, <경오자체 훈련도감자>, <을해자체 훈련도감자>, <갑진자체 훈련도감자>, <병자자체 훈련도감자> 등으로 자체별로 활자명을 붙이기도 한다.


갑인자체 훈련도감자의 크기는 대자 1.4×1.6㎝, 소자 1.4×0.8㎝이었고 경오자체 훈련도감자의 크기는 대자 1.5×1.6㎝, 소자 1.2×0.8㎝이었으며, 을해자체 훈련도감자의 크기는 중자 1.3×1.3㎝, 소자 1.0×1.0㎝이었고 갑진자체 훈련도감자의 크기는 중자 1.0×1.1㎝, 소자 0.5×0.5㎝이었다. 병자자체 훈련도감자의 크기는 1.1×1.2㎝이었다. 이들 활자의 자수는 한결같이 알 수 없다.

훈련도감자는 인쇄업무에 경험이 없던 병사들이 만든 것이라 글자 모양이 바르지 않고 자획도 고르지 않으며 인쇄도 정교하지 못하고 조잡한 편이다. 그러나 인쇄업무를 관장하던 교서관의 기능이 마비되었을 때 그 업무를 대신 수행하여 문화발전에 기여한 점은 인쇄문화사적으로 의의가 큰 것이었다.

공신도감자

공신도감자는 임진왜란 직후 공신도감의 장인들이 각종 녹권과 회맹록(會盟錄)의 간행을 위해 만든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4×1.6㎝, 소자 1.0×0.8㎝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공신도감은 임진왜란이 수습된 후 공신들에게 사급할 녹권(錄券)을 간행하고자 비교적 일찍부터 활자를 새기는 장인과 인쇄용 물자를 갖추고 운영되어 왔다.

그것은 실록청(實錄廳)이 선조 36(1603)년에 역대실록을 1차로 간행해낼 때 공신도감에 협조를 의뢰하자 이를 도와준 점에서도 입증된다. 종래 공신도감의 녹권과 회맹록은 <실록자>가 아니면 <훈련도감자>로 간행한 것으로 여겨왔으나 이들 활자와는 그 성격이 뚜렷하게 구별된다.

실록자

실록청(實錄廳)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태조에서 명종까지의 13대 실록을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에 의거하여 새로이 간행하고자 옛 갑인자와 을해자를 수습하는 한편 부족한 활자를 목활자로 섞어 쓰기 위해 활자제작 경험을 가진 훈련도감 병사들을 옮겨 작업을 하였다.

실록의 새로운 간행작업은 선조 36(1603)년부터 39(1606)년까지 4년이나 걸려 이루어졌다. 이때 간행한 태백산 사고본은 [태조실록]부터 [태종실록]까지, [문종실록]부터 [성종실록]까지, 그리고 [중종실록]의 일부(32년 5월∼39년 12월)와 [인종실록], [명종실록]까지는 갑인자와 갑인자를 닮은 목활자를 만들어 섞어 간행하였으며 [세종실록]과 [연산군 일기]부터 [중종실록] 32년 4월까지는 을해자와 을해자체를 닮은 목활자를 만들어 섞어 간행해냈다.

이들 13대 실록을 간행하기 위하여 만든 목활자와 그 뒤 [선조실록], [인조실록], [효종실록] 등의 세 실록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목활자를 총칭하여 일반적으로 <실록자>라 한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4×1.4㎝, 소자 1.0×0.7㎝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역대실록과 그 뒤에 간행된 세 실록의 목활자는 활자의 크기, 글자체 및 정교도에서 차이가 크다.

광해군 9(1617)년 4월에 간행한 [선조실록]은 갑인자체 목활자와 을해자체 목활자에 새로 만든 목활자를 많이 섞어 쓰고 있어 인쇄가 조잡하다. 역대실록에는 금속활자가 많이 섞여 있으나 선조실록에서는 새김이 거친 목활자만 사용되었는데 이 활자를 <선조실록자>라 한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4×1.4㎝, 소자 1.0×0.7㎝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효종 3(1652)년 2월에 착수하여 동왕 4(1653)년 6월에 완성한 [인조실록]을 간행하기 위하여 황양목을 여러 도에서 가져오게 하고 각수들도 여러 곳에서 징용하여 대대적으로 목활자를 만들었다. 이 목활자는 [선조실록]의 인쇄에 사용된 것보다 활자의 크기가 약간 크고 경오자(庚午字)의 필의를 지닌 글자체였는데, 이 활자를 '인조실록자'라 한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5×1.6㎝, 소자 1.4×0.8㎝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현종 원(1660)년 8월에 착수하여 동왕 2(1661)년 2월에 간행을 마친 [효종실록]은 [인조실록]을 간행한 활자보다 크기가 작고 글자체가 바르고 깨끗하며 판식이 훨씬 정돈되어 인쇄가 또렷한 편인데 이 활자를 <효종실록자>라 한다. 활자의 크기는 1.3×1.5㎝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내의원자

내의원자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 41(1608)년부터 광해군 7(1615)년 사이에 내의원이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고 의관들이 엮은 의서를 철저하게 교정하고 감수하여 간행할 때 사용되었던 한자와 한글의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중자 1.2×1.0㎝, 소자 0.8×0.5㎝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이전의 의서는 훈련도감에 의뢰하여 목활자로 간행하되 의관들이 본문을 교정하여 펴냈는데 선조 41(1608)년부터 광해군 7(1615)년까지 간행된 의서는 내의원이 직접 맡아 감교하여 간행해낸 기록이 있다.

의서는 다른 서적과 달리 작은 글자가 많아 목판 또는 목활자로 새길 때 글자가 작아 잘못해서 약명과 처방에 조금이라도 착오와 오류가 생기면 목숨에 관계가 있으므로 외부에 맡길 수 없다는 데에서 실시하게 된 것이었다. 이 활자는 새로 의뢰하여 만든 듯 활자를 만든 솜씨가 당시의 수준으로는 정교한 편이며 인쇄가 매우 깨끗하다.

글자체는 을해자체를 닮은 것이 그 특징이다. 이 활자를 만든 곳은 훈련도감이며 내의원에서는 훈련도감의 활자를 빌려쓴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문계박자

문계박자(文繼朴字)는 정조(鄭造·1559∼1623)가 광해군 13(1621)년 경상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와 순찰로 부임하였을 때 이미 활자인쇄를 경험하여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던 그의 친구 문계박(文繼朴)에게 활자를 새기는 일부터 교정과 인쇄까지 일체의 책임을 맡기고 서적을 간행할 때에 사용된 목활자로 <나주자(Ⅱ)>라고도 한다.

활자의 크기는 중자 1.3×1.2㎝, 소자 0.7×0.5㎝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글자체는 당시 유행되었던 필서체로 종래 갑인자체나 을해자체를 모방했던 관례에서 벗어난 느낌을 준다. 활자의 새김이 정교로운 편은 아니나 사사로이 만든 목활자로는 글자 모양이 가지런하고 인상적이다.

나주자

나주자(羅州字)는 호남의 나주목(羅州牧)에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16세기 전반에서 17세기 후반에 걸쳐 서적을 간행할 때 사용되었던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1.3×1.2㎝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나주에는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 전반에 목활자인 <금성자>가 사용된 적이 있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에도 나주에서는 먼저 만든 목활자가 난을 겪는 사이에 흩어지고 없어져 다시 목활자를 만들었는데 앞서 만든 을해자계와는 대조적으로 갑인자계를 닮은 필서체의 목활자라는 점이 시(詩), 어(於), 유(有), 이(而), 취(取), 약(若), 욕(欲), 동(動) 등의 글자에서 나타나고 있다.

전기 교서관 필서체자

전기 교서관 필서체자는 임진왜란 직후 인조 26(1648)년에 교서관에서 서적을 간행할 때에 사용된 목활자이다.

이 활자는 종래 <훈련도감자> 또는 <행서체 목활자>라고도 하였다. 활자의 크기는 중자 1.4×1.3㎝, 소자 1.0×0.5㎝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이후 인조반정, 정묘·병자의 양란을 거쳐 인조 말기(17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라의 인쇄업무가 옛날과 같이 교서관으로 돌아왔다.

훈련도감에서 활자제작법, 조판법, 인쇄법 등을 경험한 장인들이 교서관으로 옮겨져 인쇄업무를 재개하였다.

이는 인조 26(1648)년 8월 이시방(李時昉·1594∼1660)에게 내사한 목활자본 [찬도호주주례(纂圖互註周禮)]에 붙은 교서관제조 조경(趙絅·1586∼1669)의 발문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조경은 형조·예조·이조 등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인조 26(1648)년에는 우참찬 등의 고위관직에서 교서관제조를 맡아보면서 인쇄업무를 점차 부활시켰는데, 이 무렵부터 현종 9(1668)년에 사주 갑인자인 무신자(戊申字)가 주조되어 중앙관서의 금속활자 인쇄업무가 다시 원활하게 수행되기까지는 교서관이 목활자로 서적을 간행하여 공급하였던 것이다.

활자체는 종래의 갑인자계와 을해자계가 서로 섞인 필서체를 답습하였으며 활자의 제작은 대체로 조잡한 편이었다. 전기 교서관 필서체자는 전란으로 중단된 교서관의 인쇄업무를 다시 부활시키고 금속활자인쇄가 다시 실시될 수 있도록 중간 역할을 한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후기 교서관 필서체자

후기 교서관 필서체자(筆書體字)는 숙종 14(1688)년에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1628∼1692)이 엮은 [기아(箕雅)]의 간행에 사용된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중자 0.9×1.1㎝, 소자 0.9×0.5㎝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활자는 현종실록자와 같이 바르고 깨끗한 필서체의 중자와 소자이나 크기가 그 보다 작아 곧 식별된다.

또한 임진왜란 직후의 <전기 교서관 필서체자>와 비교하면 우선 글자체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전기 교서관 필서체자>가 갑인자계와 을해자계가 서로 섞인 필서체인 반면 이 활자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필서체이며 활자의 크기에서도 차이가 크다.

이 활자는 [기아]의 자서에서 <운각활자(芸閣活字)>라 하였고 [호곡집(壺谷集)]에서는 <운각주자(芸閣鑄字)>라 하였으나 언제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기록이 없다. 활자의 재료에 대하여 목활자설, 금속활자설, 도활자설까지 제기되었다. 동일한 글자에 같은 활자 모양이 나타나지 않고 또한 자획의 위치도 서로 같지 않으며, 당시에는 <주자>를 넓은 개념의 활자라는 뜻으로 쓰기 시작하여 철활자와 목활자 등을 포괄적으로 일컬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목활자인 듯하다.

경서정음자

경서정음자는 영조 10(1734)년에 이성빈(李聖彬) 등의 역관이 사역원에서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의 사서와 [서전], [시전], [춘추] 등의 삼경의 역학서(譯學書) 원문에 대한 중국의 바른 음을 한글로 표기하여 간행하고자 스스로 경비를 거두어 만든 한자와 한글의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2×1.5㎝, 소자 1.0×0.7㎝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이 활자를 [통문관지(通文館志)]에서는 사역원 역관 이성빈 등이 <주자(鑄字)>로 간행하여 바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금속활자본설도 있으나, 동일한 글자의 활자모양이 서로 다르고 자획이 가지런하지 않으며 또한 자획에 칼자국이 예리하게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목활자임이 틀림없다.

이 무렵에는 <주자>를 넓은 개념의 <활자>라는 뜻으로 썼던 것이다. 이 목활자의 글자체는 갑인자체를 닮은 단정하고 유려한 진체(晋體)계의 필서체이며, 자본은 사주 갑인자인 무신자(戊申字)로 삼은 듯하다. 활자를 새긴 솜씨가 비교적 정교하여 인쇄가 깨끗하다.

방 [홍무정운] 대자

방 [홍무정운] 대자(倣 洪武正韻大字)는 영조 48(1772)년 정조가 동궁으로 있을 때 명나라 성화 12(1476)년에 편찬된 [자치통감강목속편(資治通鑑綱目續編)]의 오류를 바로잡는 일을 어정서(御定書)의 머리 사업으로 삼고 공을 많이 들이는 한편 강에 해당하는 본문의 대자를 만들기 위해 홍무정운자를 본떠 자획을 크게 써서 새긴 목활자로 <통감속편대자>라고도 한다.

이 활자를 종래 <임진서문대자(壬辰序文大字)>라고도 하였다. 활자의 크기는 2.2×3.0㎝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방대한 [자치통감강목속편]의 오류의 교정과 체제의 정비 및 [사정전훈의]에 따라 범례를 마련하느라 여러 달이 걸려서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편 그 사이에 명찬서(命撰書)의 사업으로 착수한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와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이 영조 48(1772)년에 먼저 완성되니 이미 준비된 강(綱)의 대자 중에서 필요한 활자를 가려 [어제역학계몽요해]의 서문을 먼저 간행하였다. 이어 [자치통감강목속편]의 신정(新訂)이 영조 49(1773)년에 마무리되자 강(綱)의 본문은 이 활자의 대자로 간행하고 목(目)의 주석은 임진자로 간행하였다.

이와 같이 강의 대자는 [자치통감강목속편]의 본문을 간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음을 친찬의례(親撰義例)에서도 홍무정운자를 본떠 자획을 크게 하여 강의 대자를 인출하였다(倣洪武正韻字 大其 印其綱)"고 하였다.

이 활자는 새김이 참으로 정교하며, 위 글자와 아래 글자의 획이 엇물린 것이 없고 글자의 줄이 일직선이 아니라 삐뚤어진 점에서 단자(單字)로 새긴 목활자이다.

기영 필서체자

기영 필서체자는 [오산집(五山集)]을 인출하기 위해 왕명으로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만든 목활자로 <오산집자> 또는 <방취진당자>라고도 한다.

종래에는 <기영활자>라고 하였다. 활자의 크기는 중자 1.1×1.3㎝, 소자 1.0×0.5㎝였으며 자수는 16만여 자였다. 선조 때의 제술관(製述官) 차천로(車天輅·1556∼1615)의 문명(文名)이 명나라까지 떨쳤음을 들은 정조가 그의 유고인 [오산집]을 편집하여 간행하도록 홍양호에게 명하자, 홍양호가 후손들을 찾아다니며 유고를 수집하여 산정·편집하고 평안관찰사 겸 평양부윤으로 부임하였을 때 간행하여 임금에게 올렸다.

문집 권말에 붙은 홍양호의 봉교발(奉敎跋)에 의하면 그가 관서번(關西藩)으로 부임하여 내각의 지시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오산집]을 엮어 정조 15(1791)년에 중국의 무영전 취진활자식으로 인쇄해서 진상하였다고 하며, [정종실록]에서는 그것이 정조 16(임자·1792)년에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 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활자에 대하여 [오산집]의 표제면에는 <내각교정 기영활인(內閣校正 箕營活印)>이라는 인기가 있고 [목민대방(牧民大方)]의 표제면에는 <기영활인 임자간행(箕營活印 壬子刊行)>이라는 인기가 있어 종래 선학들은 <기영활자>라 하였다. 이 활자는 청나라 무영전 취진판의 영향을 받은 초기의 것에 해당하나, 그 영향은 활자를 만드는 법과 정연한 식자의 판짜기에 미친 것으로 보인다.

글자체는 우리나라의 사자원(寫字員)들이 당시 일반적으로 쓰던 힘있는 필서체이다. 이 활자는 동일한 글자의 활자모양이 서로 같지 않고 어딘가 차이가 있어 목활자임이 분명하며, 그 새김은 매우 정교하여 자획이 균정하고 글자의 배열도 정연하다.

생생자

생생자는 정조 16(1792)년 청나라의 사고전서에 들어 있는 무영전 취진판 [강희자전(康熙字典)]의 글자를 자본으로 삼고 황양목을 사용하여 만든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1×1.3㎝, 소자 0.7×0.7㎝이었으며 자수는 32만여 자였다.

이 활자는 [일성록]과 [정종실록]에 의하면 정조 16(1792)년 윤 4월 24일 내각이 어제를 간행하려고 새로 목활자를 만들어 인출한 [취진자보(聚珍字譜)]가 완성되자 이를 기영(箕營)에 보내서 동으로 16만 자를 더 만들게 했다가 그 해 6월 29일에 다시 이내 목활자 조성으로 바꾸어 내각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였음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조성과정을 볼 때, 내각이 어제를 간행하기 위해 1차에 이어 2차로 목활자를 조성하여 만든 [취진자보]가 바로 [생생자보]였던 것이다. [생생자보]는 매자 아래에 새긴 활자수의 표시와 전 224부의 자보(字譜) 말미에 대자의 원자(原字) 14,986자, 중첩자(重疊字) 144,260자 등 총 159,246자의 표시가 있고 소자도 이와 같다는 표시가 있어 당시 제작한 생생자의 대자와 소자의 총수는 318,492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순조 때의 [판당고(板堂考)]에는 대자 157,200자, 소자 164,300자로 되어있다. 자보에서의 활자수보다 대자는 2046자가 줄고 소자는 5054자가 늘어난 셈이다. 줄어든 것은 관리의 부주의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늘어난 사유는 알 수 없다.

이들 활자는 [수향편(袖香編)]의 주자소철목주자(鑄字所鐵木鑄字)에 의하면 철종 8(1857)년에 있었던 주자소의 화재로 소실되고 2만자의 소자가 남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숫자는 기록상의 착오인 듯하다. 대자는 글자모양이 넓적하고 자획이 굵은 인서체이며, 소자는 근대활자처럼 글자모양이 가는 인서체이다.

이 활자는 어제를 인출하기 위해 만든 활자이므로 새김이 매우 정교하여 모양이 정연하고 예쁘다. 이 활자를 자본으로 뒤에 주성한 '정리자'를 방불케 하여 식별이 어려울 정도다. 다만 소자에 있어 크기가 작고 자획이 가늘어 동일한 글자의 활자모양이 서로 같지 않고 어딘가에 차이가 있으며, 자획이 가지런하지 않은 것으로 식별이 가능할 뿐이다.

춘추강자

춘추강자는 정조 21(1797)년에 [춘추좌씨전]의 강에 해당하는 대자를 간행하기 위하여 만든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1.3×3.0㎝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정조 20(1796)년 겨울 초계문신 이서구(李書九) 등에게 주희(朱熹)의 [자치통감강목]을 바탕으로 세종 18(1436)년에 명찬된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와 [자치통감강목]의 체례로 경문(經文)을 강(綱)으로 하고 전문(傳文)을 목(目)으로 하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엮게 했다.

그것이 동왕 21(1797)년 가을에 편찬되고 교정되자 간행이 하명되었는데, 강에 해당하는 경문의 대자를 전 참판 조윤형(曹允亨)과 인천부사 황운조(黃運祚)에게 각각 한 벌씩 쓰게 하여 바탕으로 삼고 목활자를 만들어 그 해 12월에 간행해 냈다. 강(綱)에 해당하는 경문의 대자는 목활자이며, 목(目)에 해당하는 전문의 중자와 소자는 <정유자>이다.

[판당고(板堂考)]에 의하면 춘추강자는 5,260자이며, 종래 이 활자가 단활자(單活字)인가 연활자(連活字)인가가 문제되어 왔으나 [판당고]의 활자수에 따라 인본을 조사하면 단활자의 수와 일치한다. 또한 인쇄된 각 판은 위아래 글자의 획이 서로 엇물린 것이 자주 나타나나, 이것은 한 줄에 무리하게 식자하기 위하여 깎아 맞추었기 때문이다.

글씨체의 경우 조본은 획이 가늘고 폭이 좁으며 서법이 얌전하여 예쁜 감을 갖는 반면, 황본은 획이 굵고 폭이 넓적하며 서법이 활달하고 박력이 있다. 두 활자 모두 새김이 정교하고 깨끗하며, 또한 한 판에 금속활자와 목활자가 함께 식자되고 두 달필의 글자체가 병존하여 돋보이는 활자본의 표본이 되어왔다.

성천자

성천자는 정조 때의 문신 김한동(金翰東·1740∼1811)이 조상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오늘날의 평안남도 성천(成川)의 임소(任所)에서 구한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중자 0.9×1.0㎝, 소자 0.6×0.5㎝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정조 22(1798)년에 간행한 [문소세고(聞韶世稿)]가 초기 인본이다. [문소세고]는 그의 종형인 김진동(金鎭東)이 엮은 의성 김씨(義城金氏) 선조들의 시문(詩文)과 지장(誌狀) 등 무려 32권의 거질본이었으나, 종문이 대대로 빈한하여 간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가 활자를 구함으로써 오랜 숙원이 성취되었던 것이다.

이 활자는 기영필서체자(箕營筆書體字)와 비슷해 보이나 기영활자가 필획의 시작과 마무리에 박력이 있는 사자원(寫字員)들의 필서체라면 성천활자는 자획을 단정하고 바르게 결구되어 글자모양이 바르고 깨끗할 뿐 박력이 없는 필서체이다.

이 활자는 [문소세고]를 간행한 뒤 일가 친척, 지인들의 문집과 실기 등을 의성(義城) 중심의 영남지방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고종시대까지 간행해 내는데 이용되었다. 성천자는 후대로 내려올수록 활자가 마멸되어 나뭇결이 생기고 보자가 많이 섞여 인쇄가 조잡해졌다.

지겟다리획 인서체자

지겟다리획 인서체자는 순조 초년에 [덕촌선생집(德村先生集)]을 간행할 때 사용된 목활자이다.

양득중(梁得中·1665∼1742)의 문집인 [덕촌선생집(德村先生集)] 권말에 "정조 5(신축·1781)년 2월 외증손인 윤인기(尹仁基)가 쓴 발문에 이어 순조 6(병인·1806)년에 비로소 활자로 55벌을 간행하였다(丙寅始以活字印出五十五本)"는 기록이 표시되어 있다. 활자의 새김이 정교하고 보자가 없으며 인쇄가 매우 깨끗하다. 특히 소자가 더욱 그러하다. 새긴 지 얼마 안 되어 간행해낸 인본인 듯하다.

순조 6(1806)년 이후에는 새로 새겨 보충한 활자가 적지 않게 혼입되고 있으며 많이 쓰이는 글자인 지(之)와 같은 글자는 거의 새로 새겨 대치하고 있다. 보자가 적지 않으나 새김만은 정교하여 인쇄가 깨끗한 편이다.

이 활자는 헌종·철종·고종조를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활자를 새로 만들어 교체하고 보충하면서 주로 호남과 호서지방에서 민간의 문집·실기·연보·가승(家乘)·족보·성보(姓譜)·과환보(科宦譜)·읍지(邑誌) 등을 간행하여 공급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 일제시대 말기인 1942년에 국립중앙도서관이 충청도의 모구가(某舊家)에 세전되어 오던 것을 입수·보존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1986년도에 <민간목활자 및 인쇄용구>로 보물 제865호로 지정되었는데 그 내용에는 활자상자 1∼19개에 보존된 대자 90여자, 중자 2만자, 소자 1,200자를 비롯한 조각·조판·인쇄용 각종 도구와 낱장 인쇄물 9종이 포함되어 있다.

이 활자는 순조 초기인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나, 정확하게 누가 언제 만들었는가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이 활자를 완영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민간활자를 가지고 오게 해서 비용을 지불하고 간행해낸 것이다.

이 활자는 양호지방(兩湖地方)의 이곳저곳으로 가지고 다니며 문집, 실기, 족보, 읍지 등을 인출해주고 그 간인처를 인기에 표시해준 사례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이 활자는 오래도록 사용되어 새로 새겨 보충한 활자가 많이 혼입되어 있으며 어떤 활자는 글자모양도 다르고 그 새김이 대체로 거칠어졌지만 같은 계통의 활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활자의 자체는 중자와 소자가 다같이 인서체이다. 이 활자는 박종경(朴宗慶)의 <전사자(全史字)> 주조에 앞서 청나라 취진판 인서체자의 영향을 받아 그 글자체를 닮게 쓰면서도 독특한 특장의 서법을 가미한 것이다.

그 독특한 특징은 이를테면 과(戈), 대(代), 씨(氏), 민(民), 아(我), 성(成), 계(戒), 함(咸), 무(武) 등과 같은 글자의 지겟다리획에서 볼 수 있다. 지겟다리획의 시작에서 특이하게 구부러진 필법이라든가, 마무리에서 힘을 가하여 붓끝이 세모꼴로 넓적하게 퍼지게 했다가 붓끝을 위로 치켜올린 필법이 다른 인서체자와는 달리 사뭇 특이하고 이채롭다.

장혼자

장혼자(張混字)는 정조 때 감인소(監印所)의 사준(司準)을 지낸 이이엄(而已嚴) 장혼(張混·1759∼1828)이 순조 10(1810)년에 서적을 간행하기 위하여 사사로이 만든 소형 한자와 한글의 목활자로 <이이엄자>라고도 한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0.9×1.0㎝, 소자 0.9×0.5㎝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이 활자로 순조 10(1810)년에 [몽유편(蒙喩編)], [근취편(近取編)], [당률집영(唐律集英)] 등을 간행하였으며, 한결같이 <경오활인(庚午活印)>이라는 인기가 표시되어 있다. 장혼은 정조 14(1790)년 옛 홍문관 터에 설치된 감인소의 사준으로 입직하여 오랫동안 인쇄물의 교정을 담당했는데 그의 교정실력은 대단하게 평가되었다.

그가 사준이 된 정조 14(1790)년 이후 순조조에는 청나라 무영전 취진판본(聚珍板本)의 영향을 받아 중앙관서에서는 생생자와 정리자, 지방관서에서는 기영활자를 만들어 서적을 간행해냈고, 지방의 민간에서도 정리자체 및 필서체 철활자를 만들어 필요로 하는 서적을 다양하게 간행하여 공급하였다. 장혼자보다는 좀 뒤지나 고관과 외척들도 금릉취진자와 전사자를 만들어 일가 친척 및 친지들의 문집과 저술을 간행했을 정도로 활자인쇄가 활기를 띠었다.

이 시기에 활자인쇄의 교정실무를 담당하여 풍부한 경험을 가진 장혼은 비용이 많이 들지 않고 경제적으로 인쇄할 수 있는 지혜를 짜내서 활자를 작고 예쁘게 만들어 자기의 편저서와 친우들이 부탁하는 시문을 간행해냈던 것이다.

장혼자는 그가 사망한 뒤 한동안 인쇄에 이용되지 않다가 철종·고종 연간에 다시 서적을 간행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장혼자는 민간이 만든 소형활자이면서도 만든 솜씨가 정교하고 자체가 해정하게 결구된 필서체로서 글자 모양이 참으로 예쁘고 인상적이다.

금릉취진자

금릉취진자(金陵聚珍字)는 정조 16(1792)년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修撰), 규장각 직각(直閣), 대사성(大司成), 이조와 예조의 판서, 규장각 제학(提學) 등을 두루 역임한 남공철(南公轍·1760∼1840)이 순조 15(1815)년에 사사로이 중자와 소자의 목활자를 만들어 그의 저서인 [금릉거사문집(金陵居士文集)]을 간행해내는 데에 사용된 목활자이다.

이 활자를 종래에는 <취진자>, <금릉집자>, <규장각자>라고도 하였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1×1.4㎝, 소자 1.1×0.7㎝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활자명은 남공철이 문집을 개편하여 다시 간행한 [귀은당집] 등에서 <취진판본(聚珍版本)> 또는 <취진자파인(聚珍字擺印)>의 표시가 있는데서 종래에는 <취진자>로 불러 왔으나, <취진판> 또는 <취진자>는 기영필서체자를 비롯한 생생자, 정리자, 전사자로 간행한 인본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기 때문에, 활자를 제작한 남공철의 호이며 문집의 이름에 사용된 금릉(金陵)을 머리에 붙여 <금릉취진자(金陵聚珍字)>로 일컫고 있다.

이 활자는 운필이 여성의 필적처럼 부드러우면서 세로로 길쭉하고 자획의 파임에 굴곡상향성(屈曲上向性)이 있는 필서체인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서적의 글자를 바탕으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다.

활자의 재료부터 무영전 취진판과 같이 나무를 사용하였으며, 초인한 [금릉거사문집]의 책지는 중국의 상품 죽지를 썼고 장정도 중국산 표지로 꾸며 중국식 사침철장법(四針綴裝法)으로 장책한 것이 특징이다. 활자의 재료는 [금릉거사문집]의 표제지에 "주자로 처음 인출한다(以鑄字開印)"는 기록이 있어 종래 금속활자로 여겨왔으나, 인본의 자획에서 나무결이 보이고 자주 끊겼으며 또 굵기가 고르지 않고 칼자국이 나타나고 있어 목활자로 판정되었다.

조선 후기에 목활자를 목주자(木鑄字)라 한데서 관용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인본은 전래가 드물어 귀중한 활자인쇄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훈몽삼자경자

훈몽삼자경자(訓蒙三字經字)는 아동교육에 필요한 한자의 경문을 3자씩 떼어 구결로 토를 달고 한자로 주석한 훈몽서(訓蒙書)인 [증주삼자경(增註三字經)]의 간행을 위해 박병은(朴秉殷) 등이 순조 25년(1825)에 경문은 대자, 주문은 소자, 그리고 구결의 토는 목활자로 만들어 인쇄해 냈다.

이 활자를 <훈몽삼자경자(訓蒙三字經字)>라 하며, 구체적으로 호칭할 경우 대자는 <훈몽삼자경대자>, 소자는 <훈몽삼자경소자>, 구결자는 <훈몽삼자경구결자>라 부른다.

훈몽삼자경본은 명나라 현람당(玄覽堂)에서 만력 35(1607)년에 간행한 [신간삼자경(新刊三字經)]을 교서관(校書館)에서 입수하여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의 발문을 붙여 중간(重刊)한 판본을 바탕으로 윤광연(尹光演)이 주해(註解)에 증산(增刪)을 가하고, 간재(艮齋) 홍의영(洪儀泳·1750∼1815)이 [증주삼자경(增註三字經)]으로 개제한 것을 윤광연의 문인인 박병은, 권도인(權道仁), 윤근진(尹謹鎭), 임도철(林道喆) 등이 목활자를 만들어 순조 25(1825)년에 간행한 것이다.

훈몽삼자경자의 자본은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호(韓濩·1543∼1605)의 글씨체를 닮게 썼다. 활자 중 대자는 단자(單字)와 연자(連字)로 새긴 것이 특징이다. 민간이 만든 목활자로는 솜씨가 정교하여 대자와 소자의 글자체가 다같이 바르고 깨끗하다.

보광사자

보광사자(寶光社字)는 귤산퇴사(橘山退士)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청나라 연경 유리창(琉璃廠)의 서점에서 구입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의 간행을 위해 고종 6(1869)년 양주(楊洲) 천마산(天摩山)에 위치한 보광사(寶光社)에서 만든 목활자이다.

보광사자는 연경에서 구한 청나라 판본의 인서체자를 닮게 새겨 만든 것으로 새김이 거칠어 자획의 굵기와 가늘기가 일정하지 않고 글자모양이 가지런하지 못하여 인쇄가 조잡한 편이다.

보광사자의 인본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석성금(石成金)이 주해하고 제목을 붙인 [금강경석주(金剛經石註)] 등에 고종 6(1869)년 여름, 양주 천마산 보광사에서 간행해냈다는 인기가 있는데 본문과 간행의 교정자와 공력자(共力者), 화연(化緣)과 감동(監董), 주원(鑄員) 등이 적혀 있다. 인기의 앞에는 나라의 안녕과 태평을 비는 기원문이 있으며, 뒤에는 공덕과 명복을 기원하는 대상의 생자와 망자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다.

보광사자 인본은 전형적인 사찰시주에 의한 인쇄물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어 19세기 사찰인쇄사를 연구하는데 참고가 된다.

학부인서체자

학부인서체자(學部印書體字)는 고종 32(1895)년부터 다년간 교과서를 간행하는 데에 사용된 한자와 한글의 목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1×1.1㎝, 소자 1.0×0.6㎝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고종 31(1894)년 갑오경장으로 관제개혁이 거듭되어 내각의 명칭 아래 7개부가 새로 마련될 때 교육을 담당하는 학부도 생겨났다. 학부의 편집국에서는 당시 정치, 사회, 역사, 지리, 기예, 도의 등 여러 분야의 새로운 문물과 근대화 의식을 수용하기 위해 교과서 개편작업이 시급하였다.

그 결과 응급조처로 경종 초엽에 철로 주조하여 쓰다가 마멸되어 그대로 방치해두었던 후기 교서관 인서체자와 그것을 바탕으로 인서체 목활자를 만들어 고종 32(1895)년부터 다년간에 걸쳐 개편한 교과서를 다량 간행해냈다. 이때 사용한 목활자를 <학부 인서체자>라 한다.

학부 인서체자 인본에서 자획이 가늘게 닳고 일그러진 것은 교서관 인서체 철활자이며 자획이 굵고 먹색이 진한 것은 새로 만든 학부 인서체자 목활자이다. 이 목활자는 응급조처로 서둘러 새겼기 때문에 자획이 가지런하지 않고 활자모양이 정연치 않아 인쇄상태도 조잡한 편이다.

야소삼자경자

야소삼자경자(耶蘇三字經字)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선교를 위해 어린이용 훈몽삼자경(訓蒙三字經)의 체제에 따라, 한자로 번역한 기독교 교리의 중요 대목을 한자대자 3자씩 구분하여 1자마다 한글로 훈과 음을 표시하고 그 끝에 한글로 토를 달아 간행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들 서적에서 한자대자는 모두 목활자이고 한글소자는 목활자 또는 신연활자로 간행해냈는데 이것을 총칭하여 <야소삼자경자(耶蘇三字經字)>라 하며, 구체적으로 한자대자는 <야소삼자경대자>라 일컫는다.

야소삼자경자의 인본은 현재 3종인데, 첫째는 야소교서국(耶蘇敎書局)이 1895년 중국 종이에 인출해낸 [진리편독삼자경(眞理便讀三字經)]으로 한자대자와 한글소자가 모두 목활자이다.

둘째는 야소교서회(耶蘇敎書會)가 1895년 우리나라 한지에 간행해낸 [진리편독삼자경(眞理便讀三字經)]으로 한자대자는 목활자이나, 한글소자는 신연활자이다.

셋째는 예수교서회가 1908년 양지에 간행해낸 [진리편독삼자경(眞理便讀三字經)]으로 한자대자는 목활자이고 한글활자는 모두 신연활자이다. 야소삼자경자의 인본은 아동들에게 기독교리를 교육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나 한자의 초보적 교습을 위한 부차적 목적도 수행할 수 있도록 엮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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