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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로 고고씽~ 청주 시티투어

  • 보고싶고, 즐기고 싶은 둘러볼래
    매주 토요일 1일 1회

    KTX오송역(가경터미널) →
    한국교원대교육박물관 → 육거리시장(중식) →
    문의문화재단지 → 청남대 →
    KTX오송역(가경 터미널)

  • 청주 인기관광지만 골랐다! 알아볼래
    매주 일요일 1일 1회

    KTX오송역(가경터미널) →
    문암생태공원(정북동토성) → 고인쇄박물관 →
    용두사지철당간(중식) → 청남대 →
    KTX오송역(가경 터미널)

  • 내 맘대로 떠나는 우리동네 한바퀴
    매주 화~일요일

    사전 신청 필수 :
    내국인 30명, 외국인·협약기관 등  20명 이상

    테마형, 체험형, 체험·테마형 등 보조사업자 또는
    관광수요자 요구반영하여 자율코스 운영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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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초상(崔瑩 肖像)]+사진1
[최영 초상(崔瑩 肖像)]+사진2
[최영 초상(崔瑩 肖像)]+사진3
[최영 초상(崔瑩 肖像)]+사진4
최영 초상(崔瑩 肖像)
  • 위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713(운천동, 청주고인쇄박물관)
  • 요약정보 문화유산자료 2012.04.06

소개

고려 말기의 명장인 최영(崔瑩, 1316〜1388)의 초상이다. 최영의 본관은 동주(東州), 시호는 무민武愍으로 고려 말 사헌부 간관을 지낸 최원직崔元直의 아들이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이 서경[西京, 평양]을 함락했을 때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물리쳤다. 1361년(공민왕 10)에도 홍건적이 창궐하여 개경까지 점령하자 이를 격퇴하여 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이 되고 1376년(우왕 2)에는 삼남지방을 휩쓴 왜구를 홍산에서 대파하여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우왕 14) 명나라의 철령위鐵嶺衛 설치에 반대하여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출정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실패하였다. 후에 개성에 난입한 이성계 군을 맞아 싸우다가 체포되어 고봉[高峰, 高陽] 등지에 유배되었고 후에 참형되었다. 이 초상은 1854년(철종 5)에 최영의 27세손인 최규영이 주축이 되어 청주목 북면 금천마을에 기봉영당奇峰影堂을 세우면서 봉안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관련된 문헌이 전하지 않아 제작이나 봉안과 관련된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다. 축화軸畵[수직으로 걸 수 있게 만든 두루마리 형태의 그림] 형태로 비단 바탕에 짙은 채색을 사용해 그려졌으며 그림 전체의 크기는 71.5×123.8㎝이고 인물의 크기는 64.2×96.5㎝이다. 군청색 도포에 공작과 꿩의 깃털을 꽂은 전립(戰笠)을 쓰고 의자에 앉은 모습인 정면상의 초상으로 다섯 촉의 화살을 꽂은 전통, 깃발, 창, 칼 등의 무기를 그려 무인상武人像임을 나타냈다. 오른쪽 도포 끝자락에는 장도(長刀)의 일부가 보이고 강렬한 청색, 황색, 녹색의 안료 사용이 두드러진다. 얼굴의 눈꺼풀과 양쪽 코 가장자리, 입가 등에 약간 짙은 색을 칠해 입체감을 나타내었는데 이러한 기법은 일반 초상화나 불화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무신도(巫神圖)나 민화에 사용되는 표현 방법을 채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눈썹과 속눈썹, 눈동자, 수염 등은 가는 붓으로 정교하게 묘사하였다. 도포에는 운문(雲紋)과 연꽃 봉오리 문양이 표현되었지만 다시 칠한 짙은 채색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 현재 최영 장군의 초상화로 확인되는 작품은 전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최영은 명장으로 청렴결백하며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은 인물이었고 이성계에게 패하여 억울하게 죽은 원혼으로 무속신앙의 대상이 되어 전국의 신당(神堂)에서 위력을 지니고 인간을 이롭게하는 중요한 무신巫神으로 모셔졌다. 따라서 다양한 양식의 최영장군무신도崔瑩將軍巫神圖가 그려져 현재까지 전한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은 미숙한 신체표현, 과장된 이목구비와 음영이 지나치게 강조된 안면의 묘사, 강렬한 채색 등은 무신도의 양식적 특징과 유사하여 최영의 초상화가 전하지 않아 근거할 작품이 없는 상황에서 무신도의 도상을 원용해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민화풍의 불화와 무신도를 함께 제작했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지방화가가 그린 것으로 여겨지며 19세기 후반에 전통적인 초상화와 구별되는 이러한 양식의 초상화가 제작되었던 지역적 양상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