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1970년 운천동에서 금동불상(金銅佛像), 금고(金鼓) 등과 더불어 출토된 중간 크기의 범종으로 하대와 상대에 어떠한 문양도 없이 단순하게 구획만 둔 것이 이 종의 특징이다.유곽대 속에 3구의 비천상을 배치하고 그 사이에는 삼보문과 당초문을 새겨 넣었다. 종신(鐘身)에는 2구의 비천상(飛天像)을 배치하고 있는데 1구는 꿇어 앉아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고, 다른 1구는 꿇어 앉아 합장하고 천상으로 올라가는 유려한 모습이다. 당좌(撞座) 역시 2개이며 12판의 연화문을 돌리고 그 사이에 당초문을 장식하고 있는데 현재 용통은 일부 없어졌으나, 종의 고리부분인 용뉴는 한 마리 용이 입을 벌리고 목을 구부려 천판을 물고 있는 형태가 완전히 남아 있다. 또한 앞뒤 두구의 비천상과 당좌의 문양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 후기(9세기 중엽 경)의 종으로 추정된다. 종의 규모는 전체 높이 78cm, 종신 높이 64cm, 지름 47.4cm이다. ※ 운천동사지(雲泉洞寺址) 문헌기록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으나, 1970년 주민이 밭을 갈다 발견한 동종(銅鐘), 금고(金鼓), 향로(香爐),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과 1982년 발견된 신라사적비(新羅寺蹟碑)로 미루어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절터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1984년 발굴 조사에서 대규모의 절터가 발견되어 불교문화가 융성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주변의 백제고분군(百濟古墳群)과 흥덕사지(興德寺址)와도 연계되는 유적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