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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로 고고씽~ 청주 시티투어

  • 보고싶고, 즐기고 싶은 둘러볼래
    매주 토요일 1일 1회

    KTX오송역(가경터미널) →
    한국교원대교육박물관 → 육거리시장(중식) →
    문의문화재단지 → 청남대 →
    KTX오송역(가경 터미널)

  • 청주 인기관광지만 골랐다! 알아볼래
    매주 일요일 1일 1회

    KTX오송역(가경터미널) →
    문암생태공원(정북동토성) → 고인쇄박물관 →
    용두사지철당간(중식) → 청남대 →
    KTX오송역(가경 터미널)

  • 내 맘대로 떠나는 우리동네 한바퀴
    매주 화~일요일

    사전 신청 필수 :
    내국인 30명, 외국인·협약기관 등  20명 이상

    테마형, 체험형, 체험·테마형 등 보조사업자 또는
    관광수요자 요구반영하여 자율코스 운영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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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탑동 양관(淸州 塔洞 洋館)]+사진1
[청주 탑동 양관(淸州 塔洞 洋館)]+사진2
청주 탑동 양관(淸州 塔洞 洋館)
  • 위치 청주시 상당구 탑동로 32번길 17-6
  • 요약정보 유형문화유산 1983.03.30

소개

청주에 서양식 건물의 도입은 1904년 청주 장로교 초대 선교사인 민노아(F.S.Miller) 목사가 선교를 위해 청주에 온 후부터이다. 이 건물은 선교사들이 주거용(住居用)으로 이용하던 건물로 1904년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여 1906년 2동의 건물을 완공하고, 1910~1911년에 3동의 건물, 1932년에 1동의 건물을 완성하였다. 탑동양관(塔洞洋館)은 건립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건축적 특징을 나타내며, 서양식 건물 건립 초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양관부지 내에서 기와와 벽돌을 굽기 위한 질 좋은 점토가 발견되었고, 이를 위해 50명 이상의 사람들이 고용되어 일을 하였다고 한다. 석재는 주로 지하실 외벽 축조에 사용되었고, 이 건물들 중 한 건물의 기초석은 카톨릭 순교자들이 투옥되었던 청주감옥의 벽에서 가져다 사용하였고 벽돌 및 화강석의 접착제로는 석회에 모래를 섞어 물로 갠 석회 모르타르를 사용하였다. 양관의 건립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조하지 못하였던 유리를 비롯하여 스팀보일러, 벽난로, 수세식변기, 각종 창호 철물류 등 많은 수입자재가 사용되었다. 제1호 양관 (소열도 기념관) 1910~11년에 건립한 건물로 1921년 청주에 와서 18년 동안 활동한 소열도(T. S. Soltau : 蘇悅道) 목사가 거주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청주성경학교 원장으로 활동한 허일(Hary J. Hill : 許一) 목사가 1947년부터 1959년까지 거주 제2호 양관 (부례선 목사 기념 성경학교) 1932년 양관 6동 가운데 가장 늦게 완성된 건물로 부례선(Jason G. Purdy : 富禮善, 1897~1926.) 목사가 충북 남부지역의 선교와 농촌 봉사를 하던 중 1926년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순직하자 기독교인들과 미국의 친지, 교우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모금한 헌금으로 지어졌다. 제3호 양관 (민노아 기념관) 이 건물은 청주에서 초기부터 활동하며 양관을 모두 건축하는데 헌신한 충북 최초의 선교지도자 민노아(F. S. Miller : 閔老雅, 1866~1937) 선교사가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이다. 제4호 양관 (포사이드 기념관) 1906년에 양관 가운데 처음으로 완성되었다. 건물은 붉은 벽돌로 지었으며, 유리 창문을 아치식으로 치장하였으나, 지붕은 전통적인 기와지붕으로 하였다. 처마 장식과 주추도 한옥과 흡사하여 한국 전통건물과 서양식이 어우러진 건물이다. 내부는 온돌 대신 스팀 난방과 벽난로를 시설하고, 실내 화장실을 갖추었다. 옛 순교자들이 갇혔던 형무소에서 가져온 화강석을 초석으로 하여 지은 뜻 깊은 건물이다. 제5호 양관 (노두의 기념관) 본래 성경학교로 사용하고자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의 건축에는 미국 켄터키 주 위치타(Wichita)에 살던 매클렁(J. S. McClung) 부부가 일찍 세상을 떠난 두 아들을 기념하기 위해 8백 달러를 희사하여 지었다. 이 건물은 소민병원(蘇民病院 : Duncan Memorial Hospital)에 근무하던 의사와 선교부의 가족들이 사택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지역민에게 ‘노의사’라고 불리던 소민병원 원장 노두의(盧斗義 : D. S. Lowe) 의사가 1937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여 선교사들이 모두 강제 출국 당할 때까지 살았던 건물이다. 제6호 양관 (소민병원) 지하 1층과 지상 2층의 붉은 벽돌집으로, 선교사들은 던컨 기념 병원(Duncan Memorial Hospital)이라 불렀으나, 청주 시민들은 소민병원(蘇民病院)이라 불렀다. 이 병원은 진료실과 수술실을 갖추고 병상 20개를 가진 청주 최초의 현대식 병원으로, 주로 어려운 처지의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1917년에 소민병원의 진료소가 제일교회 옆에 마련되자 이 건물은 주로 입원실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