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표충사는 원래 삼충사(三忠祠)라 하여, 1728년(영조 4) 청주 지역을 중심으로 이인좌李麟佐 등이 난을 일으켰을 때 순절한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비장 홍림洪霖을 기리기 위해 1731년 세운 사당으로, 1736년 사액(賜額)되었다.
1728년 이인좌 등이 주동하여 무신란戊申亂을 일으켰다. 같은 해 3월 15일 상여에 무기를 감추고 청주로 진입한 반군은 야음을 틈타 읍성문을 열고 병영에 돌진하였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이봉상과 이를 막으려는 홍림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였고, 끌려온 남연년도 적을 꾸짖다 순절하였다. 조정에서는 순절 3충신을 기려 읍성 북문 안쪽에 삼충사를 세웠다. 대원군이 전국의 원우를 훼철할 때도 온전히 보존되었다.
1939년 청주 도심을 확장하면서 표충사를 열녀 해월의 묘소가 있던 곳으로 이전하였다. 해월은 홍림의 비첩으로 유복자를 앙태하여 홍림을 따라죽지 못하고 있다가 아들을 낳았으나 7세 때 죽자 따라 죽었다. 열녀문도 표충사와 함께 이전하였고 해월의 묘는 보다 동쪽 와우산 기슭으로 이장하였다.
표충사는 삼문을 들어서면 앞면 3칸,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사당이 있다. 사당의 동쪽으로 1731년에 세운 삼충사사적비三忠祠事蹟碑와 기해월열녀문妓海月烈女門이 자리한다. 삼문 앞에는 1942년에 세운 표충사이건사실비表忠祠移建事實碑가 있다.
1728년에 발생한 무신란은 붕당정치의 폐해가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영조는 난을 수습하며 탕평책을 실시하여 친위세력을 육성하였고, 지역에서는 난에 가담했던 세력과 진압세력으로 나누어 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었다. 18세기 초 우리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한 무신란의 주 무대인 청주의 대표적인 관련 유적으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