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척화비는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온 백성에게 서양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우고자 1871년 4월부터 서울과 전국의 교통요지에 세운 비석이다. 청주 척화비도 이때에 세운 것이다.
청주 척화비는 원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석교동의 어느 집 앞 길가의 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1976년 2월 29일에 발견되어 현재 위치에 옮겨 놓은 것이다. 2단의 받침돌을 쌓고 그 위에 비신을 세웠는데, 비신은 윗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남아있는 부분의 규모는 47×108×20.5㎝이며 다소 거친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풍화가 심하여 상태가 좋지 못하다.
척화비는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에 청군淸軍이 개입해 대원군을 청나라에 납치해 가고 고종이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틈을 탄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다. 청주 척화비도 이 때 철거당했는데,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던 듯 윗부분은 떨어져 나갔으며, 떨어져나간 부분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
비문의 상태는 1행의 첫 글자인 ‘양洋’자와 2행의 첫 글자인 ‘즉則’자, 그리고 3행의 첫 글자인 ‘계戒’자가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청주 척화비의 비문의 내용은 모두 3행으로, 1행과 2행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 則和 主和賣國]라고 새겨 있으며, 3행은 본문보다 작은 글씨로 “우리들 자손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