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여행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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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주 여산송씨 정려각(淸州 礪山宋氏 旌閭閣)]+사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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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여산송씨 정려각(淸州 礪山宋氏 旌閭閣)

  • 위치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181-3번지
  • 요약정보 기념물 2011.07.29
소개 임진왜란 때 동래성東萊城을 지키다 순절한 천곡 송상현(泉谷 宋象賢, 1551~1592)과 그 후손들의 가계 내에서 배출된 열녀, 효부의 정려(旌閭)이다. 송상현과 두 소실의 충렬각과 후손 밀양박씨密陽朴氏와 연일정씨延日鄭氏 효부각이 있어 일문삼려一門三閭를 이룬다. 충렬각은 송상현과 그의 소실로 함께 순절한 한금섬韓金蟾, 그리고 끝까지 정절을 지킨 이양녀李良女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당시 동래부사로 왜적을 막은 송상현은 왜군이 길을 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끝내 거부하고 순절을 택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며 신하들을 의심하던 왕의 오해를 바로 잡고, 명군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송상현의 두 소실 중 한금섬은 동래성이 함락될 순간 지붕에 올라 기와를 던지며 끝까지 저항하다 함께 순절하였다. 이양녀는 왜에 끌려가서도 끝까지 정절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정려가 1594년(선조 27) 처음 명정되어 1704년(숙종 30) 청주목 서강내일하면 강상리에 다시 세웠으며, 지금 정려는 1954년에 보수하였다. 높게 단을 만들고 삼문 형식으로 앞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기와집으로 원래 홍살 없이 주위에 철책을 둘렀으나 최근 보수하면서 홍살을 둘렀다. 충신과 두 열녀의 편액을 각 한 칸에 걸었다. 충렬각 양 옆에 위치한 두 효열각은 송현기(宋鉉器, 1684~1750)의 처 밀양박씨의 정려와 송명휘(宋明輝, 1757~1793)의 처 연일정씨의 정려이다. 밀양박씨는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고, 남편이 병으로 숨지자 다음날 목을 매 따라죽어 그 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편액에는 밀양박씨 뿐만 아니라 손자 송상휘宋尙輝의 처 채씨蔡氏의 열행과 복호復戶 사실도 기록하였다. 뒤쪽에 중수기가 있다. 연일정씨는 시부모를 정성을 다해 모시고 병들자 대소변을 받아냈다. 병환으로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 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상례와 제사에 소홀함이 없었다. 효열각은 1855년(철종 6), 효부각은 1841년(헌종 7) 명정되었다. 두 정려 모두 사방 한 칸 크기로 맞배지붕의 겹처마 기와집이다. 청주의 주요 성씨인 여산송씨의 입향入鄕과 세거(世居)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유적으로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송상현과 두 소실의 정절을 기린 충렬각과 후손 두 며느리의 효열각과 효부각은 여산송씨 천곡문중의 가풍과 조선 후기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 등을 살펴볼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