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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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근대 민족주의 사학을 개척한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의 사당 및 묘소이다.
신채호는 본관이 고령(高靈)이고 호는 단재이다. 1897년 성균관에 들어가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905년(광무 9)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황성신문에 논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초빙되어 국권회복과 민족의식 고취에 공헌하였다. 28세 무렵에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으며, 1910년 해외에 망명한 후 본격적으로 한국사 연구에 힘써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등의 저서들을 집필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수립 후에는 의정원 전원위원장으로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고,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1936년 옥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신채호 사당은 본래 1960년경에 고령신씨 종중에서 처음 건립하였던 것인데, 1978∼1979년 사이에 묘역을 정화하고 지금 위치로 옮겨왔다. 1980년에 신채호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다시 영당(影堂)으로 보수·정화하였으며, 정면에는 ‘단재영각丹齋影閣’이라는 현판을 걸고, 사당 앞에 ‘정기문正氣門’이라 이름 붙인 대문을 세우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집이다. 내부는 통칸 마루방으로 중앙에 영정을 모셨다.
신채호 묘소는 선생이 어린 시설에 살던 옛 집터에 조성한 것으로, 100여 평의 묘역에는 묘표·상석·석등·문인석·망주석 등을 갖추었다. 묘표는 한용운 등이 세웠으며, 봉분 우측에는 1972년 단재 신채호선생 유적보존회가 세운 사적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