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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로 고고씽~ 청주 시티투어

  • 보고싶고, 즐기고 싶은 둘러볼래
    매주 토요일 1일 1회

    KTX오송역(가경터미널) →
    한국교원대교육박물관 → 육거리시장(중식) →
    문의문화재단지 → 청남대 →
    KTX오송역(가경 터미널)

  • 청주 인기관광지만 골랐다! 알아볼래
    매주 일요일 1일 1회

    KTX오송역(가경터미널) →
    문암생태공원(정북동토성) → 고인쇄박물관 →
    용두사지철당간(중식) → 청남대 →
    KTX오송역(가경 터미널)

  • 내 맘대로 떠나는 우리동네 한바퀴
    매주 화~일요일

    사전 신청 필수 :
    내국인 30명, 외국인·협약기관 등  20명 이상

    테마형, 체험형, 체험·테마형 등 보조사업자 또는
    관광수요자 요구반영하여 자율코스 운영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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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읍성(淸州邑城)]+사진1
[청주읍성(淸州邑城)]+사진2
[청주읍성(淸州邑城)]+사진3
[청주읍성(淸州邑城)]+사진4
청주읍성(淸州邑城)
  • 위치 청주시 상당구 일원
  • 요약정보 청주시기념유적 제 14호 2015.04.17

소개

읍성(邑城)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기능을 담당하던 성이다. 우리나라 역사서로써 가장 오래된『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신라 685년(신문왕 5) 3월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고, 689년 윤(閏) 9월 26일에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쌓았던 기록이 있어 청주읍성의 전신은 아마도 통일신라가 9주 5소경(九州五小京) 제도를 갖추던 신문왕대(神文王代) 특히 685년부터 689년까지에 걸쳐 축조되었다고 여겨진다. 우리나라 읍성으로서 축조연대를 문헌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성에 속한다. 청주읍성은 보통 조선왕조시대의 청주목(淸州牧)의 읍성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청주읍성은 현재의 청주 시가지에서 무심천(無心川, 옛 大橋川)의 동쪽에 있으며 고려시대부터 있어온 성터가 기본이 되어 조선시대에 이어진 것이었다. 청주읍성에 관한 것은 고려 태조대에 나성(羅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상당산성(上黨山城)에서 「사량부속장지일(沙梁部屬長池馹)」의 명문와가 출토되기도 하였으므로 7세기 후반의 서원경성이 어떤 것인지 알기 어려우나, 읍성 자체가 서원경성이었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읍성 내에 있는 고려 초의 용두사지 철당간(龍頭寺址 鐵幢竿)은 고려 초부터 이곳이 읍치(邑治)의 중심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며, 청주시의 읍성이 있던 지역의 도로망이 남문에서 북문까지의 대로를 중심하여 방격(方格)으로 짜여져 있는 것은 고대(古代)의 경성방리제(京城方里制)를 방불케 하는 바가 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와 청주읍성의 축성기사가 비교적 명확하여, 시축 시기에 혼동을 가져왔으며, 고려시대 읍성이 홍수로 말미암아 훼손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토루로 된 읍성을 석축으로 고쳐 쌓은 연대는 불명확하나 1487년(성종 18)에 완공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서는 읍성은 석축(石築)이고 둘레가 1,084보인데, 성 안에 우물 13개가 있어 사철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둘레가 3,648척, 높이 8척, 『성종실록(成宗實錄)』에서는 둘레 5,443척, 높이 13척,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1,427보라 하여 각기 차이가 있다. 필사본(筆寫本)으로 남아있는 『청주읍지(淸州邑誌))』의 성지(城池)에서 읍성을 「돌로 쌓고 1,350보이다. 포루가 8곳인데 다만 두 곳이 남아있다. 높이는 8자이며, 성안에 우물 13개가 있다. 여장은 566타가 있고, 서문·남문·북문은 모두 아치식이며, 또한 문루가 있으나, 동문은 홍예를 틀지 않았고 문루도 없다.」라 하였다.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용척(用尺)의 차이와 성문(城門)의 옹성(甕城)과 문구부(門口部)의 포함여부에 따른 차이로 여겨지며, 대체로 둘레 1,640m, 성벽 높이 4m 규모였다고 여겨진다. 임진왜란 때에는 읍성을 점령한 왜군을 의병군이 탈환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청주읍성도(淸州邑城圖)』가 전라남도 구례의 운조루에 남아 있어 조선시대 후기의 읍성내 건물의 배치와 민가의 존재 상황을 대략 알 수 있다. 한편,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소위 ‘韓日合邦’) 후 관찰부(觀察府) 대신 도청(道廳)이 청주에 설치되었고, 일제는 1911년 4월 착공하여 1915년에 마친 소위 ‘시구 개정사업’을 명분으로 하여 먼저 사방의 성벽을 헐어 그 돌을 이용하여 하수구를 만들고 남석교에서 일직선으로 남문을 경유하여 북문으로 통하는 간선도로 즉 성안길(중앙로)을 개수하였다. 따라서 그 성벽 자리는 지금까지 도로의 구실을 하였으므로 성벽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처럼 일제에 의해 헐려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나 읍성이 존재했던 터전을 알 수 있고, 과거 읍성의 존재에 대하여는 문헌기록이 남아있다. 2011년 청주시에서 청주읍성 서쪽 성벽 터를 발굴조사한 결과 성벽 터가 확인되었다. 2013년 시민들의 성돌모으기로 확인된 800여개의 성돌 중 650여개의 성돌과 새 성돌을 활용하여 중앙공원 서측 출입구에서 YMCA 구간 35m의 성벽을 복원하였다. 또한 YMCA 구간(읍성 서남 성벽)에서 발굴된 옛 청주읍성 기초석을 보존처리하여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