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이 충효각은 진주 강씨(晉州姜氏) 3인의 효행과 충렬을 함께 기리고 있는 정려이다. 1544년(중종 23년) 매곡(梅谷) 강서(姜瑞, 1510~1540)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효자각,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경기도사(京畿都事)로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받고 충렬공(忠烈公)의 시호를 받은 아들 사명정(沙明亭) 강수명(姜壽男, 1552∼1592)의 충렬을 기리고자 1712년(숙종38)에 세운 충신각, 1803년(순조2)에 효행으로 교관(敎官)의 벼슬을 받고 나라에서 내린 강수남의 6대손인 강응명(姜應明)의 효자각을 함께 모시고 있다. 1712년(숙종 38년)에 임진왜란 때 경기도사(京畿都事)로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렬공(忠烈公)의 시호를 받은 그의 아들 사명정(沙明亭) 강수남(姜壽男, 1552~1592)을 합설하고, 1803년(순조 3년)에 효행으로 교관(敎官)에 증직되고 나라에서 정려한 강수남의 6대손인 강응명(姜應明)을 복설한 진주강씨 3인의 정려이다. 이 충효각은 본래 미원면 금관리 가막동에 세웠었는데 1935년에 문의면 덕유리 광원마을로 옮겼다가 1980년에 대청댐공사로 수몰 지역이 되자 다시 지금의 덕유리 산89번지로 옮겨 세웠다. 충효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충신 강서, 효자 강수남, 강응명 3인의 충효문 편액을 걸었다. 정려의 사면은 철제울타리로 두르고 출입문도 철재로 만들었으며 사면은 홍살로 막아 보호하고 있다. 안에는 ‘효자성균관진사강서지문(孝子成均館進士姜瑞之門)’, ‘충신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홍문관제학세자좌빈객오위도총부도총관행통훈대부병조정랑겸춘추관편수관증익충열공강수남지문(忠臣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弘文館提學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行通訓大夫兵曹正郎春秋館編修官贈謚忠烈公姜壽男之門)’, ‘효자성균진사증조봉대부동몽교관강응명지문(孝子成均進士贈朝奉大夫童蒙敎官姜應明之門)’이라고 쓴 3인의 편액을 걸려있다. 또한 중수기(重修記) 기문판도 함께 걸려 있다. 그리고 중수기(重修記) 기문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