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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석가탑 다라니경 중국 기원설 근거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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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고서(古書) 개인 컬렉터로는 첫 손에 꼽히는 조병순(趙炳舜) 성암고서박물관장이 요즘 싱글벙글이다. 30여년 가슴에 담았던 의문을 풀었기 때문이다. 한 세대 전, 그는 ‘大方廣佛花嚴經’(대방광불화엄경=전 40권짜리 ‘정원본 화엄경’) 8권째 책을 구입했다. ‘참 이상하다. 왜 화엄경의 ‘화’를 華(화)로 쓰지 않고 花(화)라고 썼을까?’ 애초 그는 잘못 쓴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었다. 이 책은 ‘화엄’을 쓸 때 모두 花(화)를 사용했다. 서지학자에게 물어보아도 “華(화)와 花(화)를 함께 쓰기도 한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2001년, 전기가 찾아왔다. 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196호 ‘大方廣佛 花 嚴經’(대방광불화엄경·전 80권짜리 ‘신역 화엄경’)이 최초로 전면 공개된 것이다. 서기 754년에 손으로 옮겨 적은 것임이 밝혀진 이 책에도 花(화)는 470여 차례 등장하지만, 華(화)자는 두, 세 차례 정도 등장할 뿐이었다. 서기 8세기 즈음에는 화엄이라고 쓸 때 의도적으로 花(화)로 썼던 것이다. 이유를 찾던 조씨는 측천무후(서기 625~705년)의 아버지 이름이 무사화(武士華)였으며, 무후는 아버지에 대한 공경의 뜻(피휘·避諱)에서 아버지의 이름자가 들어간 지명 화주(華州)를 태주(太州)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무후는 당 태종의 후궁이었다가 태종의 사후, 그의 아들인 고종의 비(妃)로 다시 궁에 들어와 황후가 되고 아들의 왕위를 찬탈해 스스로 황제(재위 690~705년)가 된 중국 유일의 여제(女帝). 재위 당시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일부 한자는 글자체를 바꾼 측천무후자(字)로 대체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화엄이라고 쓸 때 華(화) 대신 花(화)를 사용한 이유는 무후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 그가 죽은 뒤 華(화)를 다시 사용했지만 불경에서는 상당히 후대까지 무후 시대의 필기 전통이 이어졌다는 게 조씨의 결론이다. 조씨는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강반야바라밀경’(서기 868년·중국 제작)에는 華(화)를 쓸 곳에 모두 華(화)를 사용했다”며 “적어도 9세기 후반 이전에는 화엄을 ‘花嚴(화엄)’으로 적는 전통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가 소장하고 있는 ‘大方廣佛 花嚴經’(대방광불화엄경)도 자연 9세기 후반 이전의 것이어야 한다. 조씨는 고려시대에 간행한 화엄경에는 번역자나, 쪽수를 알려주는 장차(張次) 표시가 나타나지만 이 책에는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이 책의 출간 시기는 ‘정원본 화엄경’이 중국에서 번역된 서기 798년 이후부터 서기 9세기 후반 이전 것이라고 주장했다. 통일신라시대 이전 목판인쇄물 중 현존하는 것은 석가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서기 8세기)이 유일하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목판인쇄물이 등장한 셈이다. 조씨의 이번 ‘발견’은 일부 중국 학자들이 주장하는 석가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중국 기원설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게 됐다. 석가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서기 8세기 제작)에도 ‘華’자가 한 차례 등장하기 때문이다. 조씨는 “무후 재위 시절에는 절대 쓸 수 없었던 화(華)자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등장하므로, 중국 과학원 소속 판지싱(潘吉星)교수의 주장처럼 ‘석가탑 다라니경이 측천무후 재위 시절이던 서기 702년 중국 낙양에서 간행해 신라로 건너온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박상국 문화재 전문위원(서지학)은 “화엄경의 華(화)를 花(화)로 표시한 이유를 해명한 것은 판본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는 “조씨가 소장한 화엄경의 간행 시기를 서기 9세기 중엽 것으로 못박기에는 아직 이르다”며 “이 책이 늦어도 통일신라말~고려초에 만든, 우리나라에서 두, 세 번째로 오래된 목판본 불경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 愼亨浚기자 hjshin@chosun.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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