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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전설

주성과 용두사지 철당간

청주는 풍수지리적으로 마치 물위에 배가 떠있는 형상과 같아서 주성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청주의 별명인 주성과 연관지어 이야기 된다. 철당간에는 이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팔도를 순례하던 연등사 주지 혜원이 청주고을을 지나다가 하루밤 쉬어가게 되었는데, 그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용두사에 들어가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돛대를 세워라" 라고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 급히 용두사(지금의 철당간 주변) 주지스님을 만나니, 그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의 내용을 알 수가 없던 중 혜원스님이 혼자 목암산(우암산)에 올라가 초막을 짓고 청주 고을을 살펴보다가 어느날 밤중에 고을이 움직이는 착각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고 그 길로 내려와 용두사 경내에 철당간을 세웠다.

부모산

부모산은 청주의 강서동에 위치한 해발 232m의 작은 산이다. 본래 이산은 아양산, 악양산 등으로 불리웠다.

임진왜란 때 박춘무가 복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하고 아양산 마저 탈환하여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박춘무에게 패전했던 왜병이 아양산에는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산 주위를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하여, 그안에 갇힌 의병들은 보름이 지나자 굶어 죽는사람이 속출하게 되었는데 의병장 박춘무의 꿈속에 지팡이를 짚은 백발노인이 나타나 소나무를 가리키며 일어나라고 소리치자, 박춘무는 꿈에서 깨어나 군사들에게 소나무를 뽑게 했다. 소나무를 뽑자 식수는 물론 말에게 목욕을 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물이 솟아났다.

이것을 알게된 왜병들이 물러났고 이때부터 부모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우물을 모유정(母乳井)이라고 불렀다.

짐대마루

짐대마루는 복대에 대한 옛 지명이다. 진때마루로 발음하기도 하며, 지금은 복대(福臺)라는 한자 지명을 더 많이 쓴다. 선조때 토정 이지함과 박춘무가 아양산에 올라 복대동 일대를 보니 행주형(行舟形)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장차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번창하게 될 것이지만 정착하는 사람은 적고 뜨내기가 많을 것을 알았다.

그것은 달리는 배에 짐대(돛)가 없기 때문이며, 행주형 지세에 물이 귀하다는 데 그 원인이 있어 이곳에 번창한 도시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쇠로 만든 당간을 세우고 그 곳 마을을 짐대마루라고 불렀다. 그리고 배가 함부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아양산 동쪽 기슭(현지동동)에 쇠대를 박았다. 지금도 그 곳을 '쇠대박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연유한다.

남석교

남석교는 현재 구석교동 파출소와 동명약국 앞의 땅속에 묻혀 있다. 이 다리는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신라 박혁거세 즉위 1년에 건조되었다고는 하나 확인할 수는 없다. 이 다리는 무심천과 함께 애틋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때 어린아이를 둔 젊은 과부가 시주를 하러온 스님에게 어린아이를 맡기고 외나무 다리를 건너 성안으로 장을 보러 갔다. 그러나 스님이 잠깐 조는 사이에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건너간 외나무 다리를 건너다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장을 보고오다 이 광경을 지켜본 아이 어머니는 아들을 화장하고 중이 되어 아이의 명복을 빌었으며 이 사실을 알게된 대원사 주지스님은 튼튼한 돌다리를 놓았다는데 이 다리가 남석교이다.

무심천

남천(무심천의 옛이름)에는 큰 규모의 남석교가 있어 대교천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전하는 이야기는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다가 청주에 들러 한 여인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 뒤 이 선비가 과거에 합격하고 돌아가는 길에 들르니 그 여자는 이미 변심하여 있었다. 이를 한탄하여 읊은 시 문구 가운데『무심』이란 말이 있어 무심천의 지명유래가 되었다고도 한다.

쇠내개울

'쇠내개울'은 상당산성(上黨山城)에서 발원하여 금천동을 지나 무심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시내개울', '금천'(金川), '명암천'(明岩川)이라고도 한다. '쇠내개울'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한양을 향해 길을 떠났던 나그네 한 사람이 쌀안[米院]에서 하룻밤을 묵고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 청주성 남문 밖 합수머리에서 발을 담그고 여독을 풀고 있었다. 맑고 시원하게 흐르는 잔여울 모래 속에 발을 묻고 앉아 있으려니 오랜 발걸음으로 인한 여독이 한꺼번에 밀어 닥쳐 물에 발을 담근 채 괴나리봇짐을 베고 오수를 즐기게 되었다.

피로에 지친 몸에 덮쳐든 졸음 속에서 나그네는 누렇게 물든 서쪽 하늘에서 까마귀 떼들이 하늘을 덮으며 머리 위를 맴도는 데 기겁을 하고 잠을 깼다. 무척 오래된 잠인 줄 알았으나 실은 담배 한 대 피울 사이밖에 되지 않았다. 나그네는 몹시 불쾌한 듯 고개를 흔들며 발을 물 속에서 빼어 내려고 일어나 앉았다. 물속에 잠긴 두 발 사이에는 곱고 하얀 모래가 엷게 덮여 있었는데, 나그네는 얼핏 양 발 사이에 고여 있는 모래 속에서 둔탁한 황금색 모래가 왕모래에 끼어 고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것은 틀림없는 금이었다. 갑자기 황금을 물속에서 발견한 나그네는 설레는 가슴을 억누르고 근처에 있는 협곡을 파서 적당량의 토사를 함지에 담아 일어 보았다. 그러자 뜻하지 않게도 많은 양의 금이 나왔다. 나그네는 정신없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몇 군데의 흙을 시세(試洗)해 보니 많은 양의 금이 섞여 있었다.

이렇게 되자 나그네는 한양 가기를 포기하고 이곳에 막장을 친 뒤 덕대(德大)를 구해서 금점판(金店販)을 이루기 시작했다. 금은 합수머리에서 시작해서 북쪽으로 목암산 호암리 방면의 하천을 중심으로 해서 상당량이 매장되어 있었다. 나그네는 두더지처럼 들과 하천변을 일구었다.

이와 같은 소문은 팔도 각지에 퍼져 많은 덕대들과 금쟁이들이 이곳으로 모여 들었고, 근처 일대에는 객주방과 술집, 밥집이 늘어서게 되어 일대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부터 합수머리에서 호암리에 이르는 하천을 '금이 나오는 내'라는 뜻으로 '쇠내개울'[金川]이라 불렀다.


소재지 :
충북 청주시 상당구 금천동

구녀성

남구녀성이라는 이름에는 사연이 얽혀있다. 옛날 이곳에 홀어미가 딸 아홉과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았는데, 남매간에 불화가 잦더니 마침내 생사를 건 내기를 하게 되었다. 딸들은 산꼭대기에 성을 쌓고, 아들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기로 해서 승부를 내기로 한 것이다. 날이 지나 딸들은 성을 거의 완성시켜 가는데, 서울 간 아들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홀어미는 가마솥에 팥죽을 끓여 딸들에게 먹이며 딸들을 쉬게 했다. 그런데, 딸들이 팥죽을 식혀 가며 먹고 있는 동안 아들이 퉁퉁 부은 다리를 끌며 돌아왔다. 내기에서 진 아홉 명의 딸은 성벽 위에 올라가 몸을 던졌고, 동생은 그 길로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홀어미도 남편의 무덤 앞에 아홉 딸의 무덤을 만들고 숨을 거두었다. 그 뒤로 아홉 명의 딸들이 쌓은 성을 구녀성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아선호의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구녀성 안에는 양지 바른 곳에 여러 개의 무덤이 나란히 있어 인근지역 사람들 사이에는 아홉 딸의 무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구녀산에는 곳곳에 다양한 휴식시설과 생활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등산로 곳곳에 안내판이 있어 찾는 이들에게 불편이 없도록 해주고 있다.

궁현리

연꽃마을(궁현리)은 본래 청주군 서강내 이상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활 같이 생겨 궁현이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삼국지대에 백제의 진장군이 왕의 명령을 받아 북방을 지키고 있던 중 고구려 군사의 남침으로 격전을 벌이다가 패하여 활을 꺾어버리고 모습을 감춘 고개라 하여 활고개, 즉 궁현이라 불렀다고 한다.

중양절

중양절에 관련되어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옛날에 장방 이라는 현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근항경이라는 사람에게 한 가지 예언을 하였다. "금년 9월 9일 자네의 집에는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이네. 이 재앙을 막으려면 집안 사람 각자가 주머니를 만들어 주머니 속에 산수유를 넣어서 팔에 걸고 높은 곳에 올라가 국화술을 마시면 화를 면하게 될 것이네." 근항경은 장방의 말에 따라 그날 집을 비우고 가족들과 함께 뒷산으로 올라 갔다. 그리고는 장방이 말한대로 국화술을 마셨다. 집에 돌아와 보니 닭이며 개, 소, 양, 돼지 등이 모두 죽어 있었다. 장방은 이 소문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짐승들은 사람 대신 죽은 것이었다네. 국화술이 아니었다면 자네 식구들은 모두 죽었을 거야." 9월 9일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가 국화술을 마시거나 부인들이 산수유 주머니를 차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당산목

지금으로부터500여 년 전, 달이 밝은 밤만 되면 마을 앞 개울가 넓은 평바위에서 소복을 입은 젊은 여인이 마을을 바라보고 긴 머리를 하염없이 빗어 내렸다고 한다. 그 후 부터 병암리 마을에선 특별한 까닭도 없이 젊은이가 해마다 한 사람씩 죽어갔다. 큰 걱정 속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어느 고명한 스님을 찾아가 그 사연을 알리고 처방을 물으니, 마을 앞에 버드나무를 심어 개울 건너편의 평바위를 보이지 않게 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이 버드나무를 심게 되었으며, 마을은 다시 평안을 되찾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말무덤

충북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매봉리에 매봉산이라는 구릉이 있다. 옛날 이곳에 한 장수가 말 한필 얻기를 원하며 산속에서 활쏘기 연습 중에 노인의 비명 소리를 듣고 가보니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노인은 도술을 익히는 비서를 여우에게 빼앗긴채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었다. 장수는 얼른 활을 뽑아 달아나는 여우를 쏘아 그 비서를 노인에게 찾아주었다. 노인은 고마움에 뭔가 보답할 길을 얘기하니 장수의 말인즉 「말 한필 갖고싶다」는 것이었다. 이에 노인은 마시장에서 검정색에 마르고 병든 말을 헐값으로 사주며 「이 말을 갈대 숲에서 강물을 먹이며 백일을 기르면 바람처럼 달리는 천리마가 될 것」이라 했다. 노인의 말대로 하였더니 과연 준마가 되었다. 하루는 장수가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에 말을 끌고 노산천으로 가서 말에 올라 매봉을 향해 활을 쏘아놓고 달렸으나 바람처럼 달려온 천리마의 눈에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장수는 말이 늦게 달려 화살을 잡지 못했기 때문인줄 알고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죽이고 나니 그제야 바람소리를 내며 쏜 화살이 날아왔다. 장수가 노인이 충고한 말을 상기하며 땅을 치며 통곡하고는 말시체를 후하게 장사지내어 무덤을 만들어 준 것이 오늘날 매봉산에 있는 말무덤이다.

다람절 풍혈 현암사

하석리 구룡산 능선의 현암사는 바위에 매달렸다는 뜻으로 풍수지리상 고목나무에 제비가 집을 지은 연소형 지세인데 나무에 매달린 다람쥐 같다고 해서 ‘다람절’이라고도 불렀다. 고려 광종 때 현암사 주지는 화진스님 이었는데 어느 해 겨울에 폭설이 내렸다. 눈은 보름이나 내려서 마을과 들과 산이 눈으로 두껍게 덮여서 산짐승과 날짐승들은 먹이를 구하지 못해서 굶어 죽고 사람 사는 마을에서도 나무를 구하지 못하여 불을 때지 못하고, 돌아다닐 수가 없어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절에도 양식이 떨어져 걱정만 하고 있을 때 절에는 어린 사마승이 하나 더 있었다. 사마승이 닷새를 굶고 쓰러지자 화진스님이 법당으로 업고가 독경을 하며 부처님께 자비를 빌자 서광이 비치며 산신각 뒤에 있는 바위문을 열고 공양미를 얻도록 하라는 목소리를 듣고, 산신각뒤 바위밑에 막혀있던 돌맹이를 빼자 한 사람 몫의 쌀이 나왔다. 사마승에게 먹이고, 다시 구멍을 열자 다시 한 사람 몫의 쌀만 나왔다. 하루 세끼거리 이상의 쌀은 나오지 않았다. 눈이 녹자 쌀구멍에서 나온 쌀을 모아 마을로 내려가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사람들을 구하였다. 그러던 중 쌀나오는 속도가 느려 조바심이 난 사마승이 쌀구멍을 키워 놓으면 쌀이 빨리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쇠부지깽이로 쌀구멍을 쑤셔 키우니, 바위에서 큰소리와 연기가 나고 검게 타버린 쌀알 몇 알이 나오고 그 후로 쌀이 나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바람만 나온다고 하여 풍혈(風穴)이라 하였으나, 언제부터인가 바람대신 물이 나오기 시작하여 우물로 사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람굴은 법당 옆 바위에 있는데 돌로 쌓아 물 저장고를 만들어 지금은 맑고 시원한 청수가 흐르는 것을 볼 수 없게 하였다. 그 물은 사람의 욕심이 지나치면 복이 화로 변한다는 가르침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대청댐과 청남대의 예언

고려시대의 인륜선사는 문의현을 “정기는 영명하고 장차 문(文)과 의(義)가 크게 일어나 숭상될 것이다. 육로와 수로가 사통팔달했으니 마을과 인물이 번성하리라. 그러나 1천년 뒤에는 물 밑에 잠길 운세인데, 그 때 새 터전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고 한다. 신라시대 원효대사는 인도로 불교를 수도하러 가던 중에 해골바가지에 담길 물을 모르고 맛있게 마셨으나, 해골인 것을 알고 토하면서 깨달음을 얻은 후, 돌아와서 현암사에서 2년동안 수도하였다. 원효대사는 현암사 자리에 2층 누각을 짓고 삼호루란 편액을 걸고 “1천년 후 구룡산 앞에 세 개의 호수가 왕자 형상으로 생길 것인데 임금이 살고 나라의 중심이 될 것이다.” 예언하였다. 그 예언이 맞은 것인지 대청댐에 물이 잠기며, 대전시 미호동, 청남대 쪽인 황호동, 문의면 가호리에 물이 차 세 호수가 되었다. 이들 이름은 대청댐 이전부터 있어 온 이름이며, 또한 청남대가 생겨 대통령의 별장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많은 방문객들이 방문하는 관광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정렴전설

정렴(1506~1549)의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 본관은 온양(溫陽)으로 정순붕(鄭順朋)과 양녕대군 증손녀인 완산이씨(完山李氏) 사이 오형제중 장남으로 1506년(중종1년) 3월에 태어났다. 정렴은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인으로 천문, 지리, 의약, 복서(卜筮:점)는 물론, 불교와 선도, 음악과 그림에 능통하였다. 정렴은 1537년(중종 3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장악원주부, 관상감과 혜민서 교수를 겸하여 인종을 진찰하고 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장혜(章惠)인데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포천현감을 마지막으로 사직하였다. 정렴은 몸이 약하여 심신단련을 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유․불․선 모두 득도하여 용호대사라 불리며 천기와 오기(五氣:理氣 자연의이치 및 사계절 날씨변화)를 내다보고, 백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산새나 짐승과 대화가 가능하였다고 전해진다. 저서로는 북창집(北窓集), 북창비결(北窓秘訣:龍虎秘訣), 유씨맥결(劉氏脈訣), 정북창방(鄭北窓方), 동원진주낭(東垣珍珠囊), 궁을가(弓乙歌)가 있는데 북창비결은 정감록으로도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