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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물어보고... 작성자, 내용, 파일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제목 RE:물어보고...
작성자 관리자
내용
오늘(2월 23일)은 인류 문명사에 있어서 3대 혁명으로 불리는 인쇄 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인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탄생하고, 또 사망한
날이다. 한 날에 탄생해서 사망한 사람이 흔치 않은데 그것도 세계 정신문화 혁명의 주인공의 경우라 역사적으로 더 의미가 있는 날이 아닌가 싶다.



구텐베르크는 14세기가 끝나가는 해(1399)에 독일의 한 도시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당시 마인츠는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선제후가 통치하는 지역이었고, 독일 가톨릭의 중심인 마인츠 성당이 있던 정치, 종교, 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었다. 물론 이곳이
오늘날과 같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구텐베르크와 마르틴 루터 등 혁명의 주체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마인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위대한 정신 혁명의 주체가 된 것인지, 아니면 그가 있어서 마인츠가 위대한 도시가 된 것인지는 분간하는 것
자체가 의미는 없지재산이 많은 부모 밑에서 성장한 구텐베르크는 대학교육까지 받은 야망 있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부모의 재산만으로는 자신의
야망을 다 채울 수 없었던 것 같다. 그의 젊은 시절의 기록들을 보면 구텐베르크는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돈을 많이 필요로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도박에 자주 빠지곤 했다. 그런 습관이 결국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다 탕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도박이 그에게 비극적인 인생을 가져다주지 않았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이다. 오히려 그는 도박을 통해서 두 가지를 얻었다.
하나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더욱 더 구체적인 의지를 키웠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야망과 명예를 위해서 항상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역량을 집중시켰다.



또 하나는 도박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것이다. 당시 도박에 사용되던 골패는 그로 하여금 나무에 글자를 새겨 찍는 목판 인쇄를 구현하도록
도와주었다. 목판 인쇄 기술을 활용하던 구텐베르크는 나무가 너무 약하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구리를 녹여 금속 활자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는 금속 기술자였던 휴머리와 함께 금속활자를 만드는데 성공을 하게 된다.



도박이 그의 인생을 역전시킨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암튼 활자 인쇄를 발명한 구텐베르크는 주로 면죄부를 찍어서 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에게 부를 안겨준 것은 역시 성서 인쇄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다. 당시의 성서는 양피지에 필사한 필사본 밖에 없던 시대였다. 구텐베르크는
값비싼 양피지 성서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간파하고 대량으로 성서를 찍어낼 수 있는 인쇄술을 바탕으로 하여 성서를 출판했다. 이 때
출판된 성서 한 권 값이 사제의 3년 치 월급 정도 되었기 때문에 그는 순식간에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영국 BBC의 베테랑 다큐멘터리 작가인 존맨이 쓴 <구텐베르크 혁명>(남경태 역, 예지출판사, 2003)이란 책에 보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은 사업가로서의 그의 기질에서부터 유래되었음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구텐베르크야 말로 당대의 벤처사업가라고 주장한다. 돈에
대한 그의 욕망과 사업 수완이 금속 활판 인쇄술의 발전을 가져왔고, 그로 인해 많은 책들이 출판되면서 지식 독점이 무너지고 그로 인해 의식
개혁, 종교 개혁 등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로 보면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는 공민왕(21년, 1372) 때 고려에서 만들어진
<직지심체요절>(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보다 70여 년이나 늦게 발명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구텐베르크의 발명을 주목하는 것은
그의 발명이 인류사회에 끼친 영향 때문으로 이해된다. 구텐베르크의 발명은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어 중세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명을 이룩하였다.
사실 그 사건은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엄청난 혁명을 이룩하였다. 그 혁명은 증기기관차와 전화의 발명으로 이룩된 1800년대의
산업혁명이나 20세기 컴퓨터와 WWW로 인한 정보통신 혁명에 버금가는 인류사에 있어서 대단한 전환이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에 비해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세계적으로 탁월한 발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 가치가 부각되지 못했기 때문에 구텐베르크의 발명에
밀리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물론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고,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인정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 발명이 끼친 인류문화사적 영향에 대해서는 그리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인쇄술의 인류사적 가치를 보면서 우리에게 부여된 한 가지 과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동양에 끼친 영향은 크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 자료들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차제에 서둘러 고려의
인쇄술이 동양에 끼친 영향을 더욱 더 자세하게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울러 이러한 동양의 인쇄술과 서양의 인쇄술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더 깊은 연구가 요청된다.



구텐베르크가 어느 날 갑자기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목판 인쇄술을 통하여 구현되었던 기술이었다. 이 목판
인쇄술을 더 견고한 금속활자로 대처하려는 아이디어가 혁명의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기존에 존재하던 목판 인쇄술에 대한 동양의 역할,
아니 한국의 역할을 고려하면서 인쇄술에 끼친 우리의 영향력에 대한 전반적인 재조명이 하루 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청주에 세워진 고 인쇄박물관을 독일의 마인츠에 있는 구텐베르크 박물관만큼 세계적인 명소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하는 등 문화 컨텐츠 개발을 위한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성서를 찍어 내었다. 그러나 우리의 금속 활자는 학승(學僧)들의 공부를 위해
교과서로 사용하기 위한 출판 의도에 의해 발명되고, 그런 목적 하에서 <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한 것이다. 그 고상한 정신과 발명 의지가 오늘
우리에게도 계승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하루 속히 우리의 품으로 되돌려지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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