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활자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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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활자인쇄술은 북송의 경력연간에 필승에 의하여 교니활자인쇄술이 발명되었을 때에 이미 필승에 의하여 시험적으로 사용되었으나, 당시에는 실용에 성공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목활자인쇄술이 실용에 성공한 것은 원대의 왕정(王禎, 13세기 후반∼14세기전반)에 이르러서였다. 왕정은 자가 백선(伯善)이고 동평(東平, 현 산동) 사람이었다. 그는 안휘(安徽) 정덕현(旌德縣)의 현관(縣官)을 지내면서 청렴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 업적도 탁월하였다.
특히, 농업생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농업에 관한 문헌자료를 정리하여 [농서(農書)]라는 방대한 저술을 편찬하였다. 그는 공장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설계로 3만여 개의 목활자를 제작하였으며, 그 목활자로 무종(武宗) 지대(至大) 4(1311)년에 [정덕현지(旌德縣志)]를 시인(試印)하였는데 6만여 자의 현지는 1개월이 걸리지 않고도 100부가 인성(印成)되어 그 효과가 매우 컸던 것이다.
이 때에 인출된 서적은 산일되었으나, 왕정에 의하면 활자판의 효능으로 볼 때 몇 차례는 더 인출할 수 있었던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왕정은 인종(仁宗) 황경(皇慶) 2(1313)년에 그가 [농서]를 인출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을 때, 정덕을 떠나 강서(江西) 영풍(永豊, 현 광풍)으로 임직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그 때 목활자를 안휘에서 강서로 가져가 계속하여 간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그러나 강서에서는 장인들을 모으면 얼마든지 각판을 통한 목판인쇄술로 간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에 목활자를 사용하여 간행하려던 계획을 중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의 저술 [농서] 권22의 부록에 있는 '조활자인서법(造活字印書法)'에는 사운(寫韻)·각자(刻字)·거자(鋸字)·수자(修字)·감자(嵌字) 등을 비롯하여 조륜(造輪)·취자(取字)·안자(安字)로부터 인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상세하고도 체계적으로 설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