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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야기

Cheongju city

문화관광

말무덤

청주시 현도면 매봉리에 매봉산이라는 구릉이 있다. 옛날 이곳에 한 장수가 말 한필 얻기를 원하며 산속에서 활쏘기 연습 중에 노인의 비명 소리를 듣고 가보니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노인은 도술을 익히는 비서를 여우에게 빼앗긴채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었다.

장수는 얼른 활을 뽑아 달아나는 여우를 쏘아 그 비서를 노인에게 찾아주었다. 노인은 고마움에 뭔가 보답할 길을 얘기하니 장수의 말인즉 「말 한필 갖고싶다」는 것이었다. 이에 노인은 마시장에서 검정색에 마르고 병든 말을 헐값으로 사주며 「이 말을 갈대 숲에서 강물을 먹이며 백일을 기르면 바람처럼 달리는 천리마가 될 것」이라 했다.

노인의 말대로 하였더니 과연 준마가 되었다. 하루는 장수가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에 말을 끌고 노산천으로 가서 말에 올라 매봉을 향해 활을 쏘아놓고 달렸으나 바람처럼 달려온 천리마의 눈에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장수는 말이 늦게 달려 화살을 잡지 못했기 때문인줄 알고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죽이고 나니 그제야 바람소리를 내며 쏜 화살이 날아왔다. 장수가 노인이 충고한 말을 상기하며 땅을 치며 통곡하고는 말시체를 후하게 장사지내어 무덤을 만들어 준 것이 오늘날 매봉산에 있는 말무덤이다.

다람절 풍혈 현암사

하석리 구룡산 능선의 현암사는 바위에 매달렸다는 뜻으로 풍수지리상 고목나무에 제비가 집을 지은 연소형 지세인데 나무에 매달린 다람쥐 같다고 해서 ‘다람절’이라고도 불렀다.

고려 광종때 현암사 주지는 화진스님이었는데 어느해 겨울에 폭설이 내렸다. 눈은 보름이나 내려서 마을과 들과 산이 눈으로 두껍게 덮여서 산짐승과 날짐승들은 먹이를 구하지 못해서 굶어죽고 사람 사는 마을에서도 나무를 구하지 못하여 불을 때지 못하고, 돌아다닐 수가 없어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절에도 양식이 떨어져 걱정만 하고 있을때 절에는 어린 사마승이 하나 더 있었다. 사마승이 닷새를 굶고 쓰러지자 화진스님이 법당으로 업고가 독경을 하며 부처님께 자비를 빌자 서광이 비치며 산신각 뒤에 있는 바위문을 열고 공양미를 얻도록 하라는 목소리를 듣고, 산신각뒤 바위밑에 막혀있던 돌맹이를 빼자 한사람 몫의 쌀이 나왔다. 사마승에게 먹이고, 다시 구멍을 열자 다시 한사람 몫의 쌀만 나왔다. 하루 세끼거리 이상의 쌀은 나오지 않았다. 눈이 녹자 쌀구멍에서 나온 쌀을 모아 마을로 내려가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사람들을 구하였다. 그러던 중 쌀나오는 속도가 느려 조바심이 난 사마승이 쌀구멍을 키워 놓으면 쌀이 빨리 나올것이라고 생각하여 쇠부지깽이로 쌀구멍을 쑤셔 키우니, 바위에서 큰소리와 연기가 나고 검게 타버린 쌀알 몇알이 나오고 그 후로 쌀이 나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바람만 나온다고 하여 풍혈(風穴)이라 하였으나, 언제부터인가 바람대신 물이 나오기 시작하여 우물로 사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람굴은 법당 옆 바위에 있는데 돌로 쌓아 물 저장고를 만들어 지금은 맑고 시원한 청수가 흐르는 것을 볼수 없게 하였다. 그 물은 사람의 욕심이 지나치면 복이 화로 변한다는 가르침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대청댐과 청남대의 예언

고려시대의 인륜선사는 문의현을 “정기는 영명하고 장차 문(文)과 의(義)가 크게 일어나 숭상될 것이다. 육로와 수로가 사통팔달했으니 마을과 인물이 번성하리라. 그러나 1천년 뒤에는 물 밑에 잠길 운세인데, 그 때 새 터전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고 한다.

신라시대 원효대사는 인도로 불교를 수도하러 가던 중에 해골바가지에 담길 물을 모르고 맛있게 마셨으나, 해골인 것을 알고 토하면서 깨달음을 얻은 후, 돌아와서 현암사에서 2년동안 수도하였다. 원효대사는 현암사 자리에 2층 누각을 짓고 삼호루란 편액을 걸고 “1천년 후 구룡산 앞에 세 개의 호수가 왕자 형상으로 생길 것인데 임금이 살고 나라의 중심이 될 것이다.” 예언하였다. 그 예언이 맞은 것인지 대청댐에 물이 잠기며, 대전시 미호동, 청남대 쪽인 황호동, 문의면 가호리에 물이 차 세 호수가 되었다. 이들 이름은 대청댐 이전부터 있어 온 이름이며, 또한 청남대가 생겨 대통령의 별장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많은 방문객들이 방문하는 관광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정렴전설

정렴(1506~1549)의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 본관은 온양(溫陽)으로 정순붕(鄭順朋)과 양녕대군 증손녀인 완산이씨(完山李氏) 사이 오형제중 장남으로 1506년(중종1년) 3월에 태어났다. 정렴은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인으로 천문, 지리, 의약, 복서(卜筮:점)는 물론, 불교와 선도, 음악과 그림에 능통하였다. 정렴은 1537년(중종 3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장악원주부, 관상감과 혜민서 교수를 겸하여 인종을 진찰하고 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장혜(章惠)인데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포천현감을 마지막으로 사직하였다.

정렴은 몸이 약하여 심신단련을 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유․불․선 모두 득도하여 용호대사라 불리며 천기와 오기(五氣:理氣 자연의이치 및 사계절 날씨변화)를 내다보고, 백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산새나 짐승과 대화가 가능하였다고 전해진다. 저서로는 북창집(北窓集), 북창비결(北窓秘訣:龍虎秘訣), 유씨맥결(劉氏脈訣), 정북창방(鄭北窓方), 동원진주낭(東垣珍珠囊), 궁을가(弓乙歌)가 있는데 북창비결은 정감록으로도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