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금속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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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금속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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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고려시대의 그것에 비하여 발전되고 향상된 것이었다. 계미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주조된 금속활자여서 고려시대의 금속활자와 같이 미숙하고 치졸하였으나 갑인자 이후로부터는 고려시대에 비하여 훨씬 향상된 금속활자 주조술과 조판술을 바탕으로 보다 발전된 금속활자 인쇄술을 구가하였던 것이다.

기록과 실물을 통하여 조선시대의 금속활자에 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계미자

계미자로 찍은 십칠사찬 금고동요 이미지

계미자로 찍은
십칠사찬 금고동요

계미자는 태종 3(계미·1403)년에 주성된 동활자이다. 자본은 경연에 소장되었던 남송의 촉본 「시」, 「서」, 「좌씨전」 등으로 하였으며, 필체는 남송본에서 볼 수 있는 글자체와 비슷한 구양순체의 바탕에 원필이 곁들여져 있다.

활자는 태종 3년 2월 18일에 주자소에서 착수하여 수개월이 걸려 대자, 소자, 특소자 등 도합 수십만 자가 주조되었다. 활자의 모양은 끝이 둥근 추형이었으며, 크기는 대자 1.4 1.7㎝, 소자 1.0 0.8㎝이었다.

계미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주조된 금속활자여서 고려말기의 흥덕사자에 비하면 활자주조에 있어 바탕글자를 새겨 부어내는 과정과 방법이 대폭 개량되기는 하였으나,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여전히 고르지 않고 또 자획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획이 부분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도 있어 인쇄상태가 깨끗하지 못하였다.

조판술도 크게 개량되기는 하였으나 사주와 계선까지 고착된 인판틀에 크기와 두께가 일정하지 않은 활자를 꽉 들어맞도록 무리하게 배열하였기 때문에 옆줄이 맞지 않고, 윗글자와 아래글자의 획이 엇물려 있거나 각 줄에는 18∼20자로 글자의 출입이 있다. 계미자의 조판법은 인판틀 바닥에 먼저 밀랍을 깔고 활자를 배열한 다음, 열을 가하여 밀랍을 녹이고 판판한 철판으로 위에서 고르게 눌러 금속활자면을 평평하게 하고 식혀서 개개의 활자가 굳어지면 인쇄하였다.

그러나 밀랍의 응고력이 약하여 인쇄 도중에 자주 흔들리고 기울어져 수시로 밀랍을 녹여 부어야 했으므로 하루에 인출해 내는 수량이 겨우 수지(數紙)에 지나지 않았다. 활자는네모서리의 끝을 송곳 모양으로 뾰족하게 만들었으나, 활자의 크기와 두께는 물론 거친 인판틀로 인하여 인쇄 도중에 동요가 잦았다.

경자자

경자자로 찍은 소미가숙점교부음통감절요 이미지

경자자로 찍은
소미가숙점교부음통감절요

경자자는 세종 2(경자·1420)년에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하여 주성된 동활자이다. 주조기간은 세종 2년 11월에 착수하여 7개월이 걸려 완성하였다. 자본은 계미자의 자본과 같이 경연 소장의 「시」, 「서」, 「좌씨전」 등으로 하였으나, 계미자가 남송본의 자체를 바탕으로 한데 비하여 경자자는 원대 전후 무렵까지의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자체에 해당된다.

주조된 활자는 대자와 소자였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활자의 모양은 네 면을 낸 추형이었으며, 크기는 대자 1.1X1.3㎝, 소자 1.1X0.6㎝이었다. 경자자는 계미자에 비하여 한 단계 발전된 활자였으나 갑인자에 비하면 주조의 솜씨와 활자모양의 정연한 정도가 훨씬 떨어진다.

활자의 모양은 계미자가 밀랍에 잘 식자될 수 있도록 끝을 둥근 추형으로 만들었던 것에 비하여 경자자는 네 면을 낸 추형의 활자로 만든 것이다. 경자자의 조판술은 계미자에 비하여 계선이 위아래 변에서 떨어지는 고착식 인판틀로 개량되었으나, 갑인자의 조립식 인판틀에 의한 조판술에 비하면 활자의 크기가 일정치 않아 옆줄이 잘 맞지 않고 다소의 출입이 있다.

그러나, 인쇄의 능률은 계미자에 비하여 크게 증가되어 하루에 20여지를 인출해낼 수 있었다.

초주갑인자

초주갑인자로 찍은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 이미지

초주갑인자로 찍은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

초주 갑인자는 세종 16(갑인·1434)년에 경자자가 가늘고 빽빽하여 보기가 어려워 다시 금속으로 주성한 동활자로 위부인자라고도 한다. 이천의 감독아래 장영실과 이순지 등이 업무를 관장하여 그 해 7월부터 2개월이 걸려 20여만의 대자와 소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자본은 경연에 소장된 「효순사실」, 「위선음즐」, 「논어」 등으로 하고, 부족한 글자는 뒤에 세조로 즉위한 진양대군이 모사한 글자로 보충하였다.

활자의 모양은 네모가 반듯하고 평평하였으며, 우리나라 금속활자의 백미로 손꼽히고 있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가 1.4X1.6㎝, 소자는 1.4X0.8㎝이었다. 갑인자를 주조하는데 관여한 인물들이 당시의 천문기기를 제작하는 과학자나 기술자였던 만큼 활자의 모양이 자못 정교하다.

조판에 있어서는 처음으로 대나무나 나무 조각으로 빈틈을 메우는 정교하고 튼튼한 조립식 인판틀을 채용하였으며, 하루에 40여지를 간행해낼 수 있었다. 갑인자에 이르러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술은 고도의 발달을 보았던 것이다.

경오자

경오자로 만든 신편산학계몽권상 이미지

경오자로 만든
신편산학계몽권상

경오자는 문종 즉위(경오·1450)년에 만들어진 동활자로 안평자라고도 한다. 자본은 당시 명필가로 알려진 안평대군이 쓴 박력있는 독특한 글씨체였다.

활자의 자수는 알 수 없으며, 활자의 크기는 대자 1.5X1.6㎝, 소자 1.4X0.80㎝이었다.

이 경오자는 세조 원(1455)년에 을해자를 주조할 때 녹여 사용되었는데, 폐기된 이유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다 죽음을 당했던 안평대군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을해자

을해자로 찍은 주자대전 이미지

을해자로 찍은
주자대전

을해자는 세조 원(을해·1455)년에 만들어진 동활자로 강희안자라고도 한다. 자본은 강희안(1417∼1464)의 글씨로 하였으며, 중자에는 강희안 글씨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으나, 소자는 폭이 좁아 강희안 글씨의 특징이 잘 나타나지 않고 있다.

활자는 대자, 중자, 소자의 3종으로 만들어졌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8X2.3㎝, 중자 1.3X1.5㎝, 소자 1.0X1.0㎝이었으며, 자체는 편편하고 대체로 폭이 넓다. 을해자의 대자, 중자 및 소자로 간행한 서적은 불교전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을해자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갑인자와 함께 주로 사용되고 또 임진왜란 후에도 을해자체 목활자를 만들어 실록의 간행에 사용되었다. 따라서 을해자는 오래도록 사용되었기 때문에 중종·명종 연간에 나온 인본에는 활자가 마멸되고 보자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선조 6(1573)년 12월에는 크게 보주가 이루어져 인쇄상태는 한결 좋아지게 되었다.

정축자

정축자로 찍은 금강반야바라밀경 이미지

정축자로 찍은
금강반야바라밀경

정축자는 세조 3(정축·1457)년 9월에 만들어진 동활자로 금강경대자라고도 한다. 활자의 자수는 알 수 없으며, 활자의 크기는 2.0 1.9㎝의 대자이다.

세조는 젊은 나이로 죽은 의경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많은 불경을 간행하게 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자본은 세조가 친히 쓴 세로가 길쭉한 서법의 해정한 필서체였으며, 활자의 주조가 정교하여 필력이 다른 활자의 대자보다 비교적 예리하게 나타나고 있다.

무인자

무인자로 찍은 교식추보법 가령 이미지

무인자로 찍은
교식추보법 가령

무인자는 세조 4(무인·1458)년 1월에서 7월 사이에 만들어진 동활자로 종래 교식대자라고도 하였다.

「교식추보법가령」의 본문 대자와 「역학계몽요해」의 본문 대자 및 주문의 특소자를 간행하기 위해 주조된 것이다. 활자는 대자와 소자로 만들어졌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8X2.0㎝, 소자 1.4X0.4㎝이었으며, 자체는 송설체의 필의가 짙게 나타나고 있다.

을유자

을유자로 찍은 문한류선대성 이미지

을유자로 찍은
문한류선대성

을유자는 세조 11(을유·1465)년에 만들어진 동활자로 정난종자라고도 한다. 세조가 원각사를 준공하고 난 뒤 바로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을 간행하기 위하여 정난종의 글씨를 자본으로 주조한 것이다.

활자는 본문을 위한 한자활자와 구결을 달기 위한 한글활자를 함께 주성하였다. 한자활자는 대자, 중자, 소자의 3종으로 만들어졌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5 2.1㎝, 중자 1.0 1.0㎝, 소자 1.0 0.6㎝이었으며, 자체는 편편하고 대체로 폭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을유자는 글자체가 부정하다 하여 쓰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갑진자를 새로 주조할 때 녹여 썼으나, 세조 때에 우리나라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주성한 마지막의 독자적인 금속활자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갑진자

갑진자로 찍은 신편고금사물류취 이미지

갑진자로 찍은
신편고금사물류취

갑진자는 성종 15(갑진·1484)년 8월 24일에 착수하여 그 다음해 3월에 완성된 동활자이다. 자본은 대내에 소장된 「구양공집」과 「열녀전」으로 하고 부족한 글자는 박경에게 쓰게 하여 중자와 소자로 30여만자를 주성하였다. 활자의 크기는 중자 1.0X1.1㎝, 소자 0.5X0.5㎝이었다.

갑진자를 새로 주성한 동기는 당시에 주로 사용되었던 갑인자와 을해자의 활자가 커서 종이의 소모가 심하고 권질이 무거워 불편하였으며 오랜 동안의 사용으로 인한 활자의 보주로 인쇄가 처음처럼 깨끗하지 못한데다 을유자의 활자모양이 부정하여 사용하기를 꺼려했던 데에 있었다.

이러한 동기에서 새로 주성되었으므로 종래의 어느 활자보다도 크기가 작으면서도 활자모양이 바르고 예쁘며, 서적이 작고 가벼워 휴대하기가 편리하였다. 갑진자는 갑인자와 을해자 다음으로 오래 사용되었으나, 중종 이후에는 보주가 많아지게 되었다.활자가 작고 자획이 가늘어 쉽게 마멸된 까닭에 인쇄가 깨끗하지 못하고 판독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

계축자

계축자로 찍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미지

계축자로 찍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계축자는 성종 24(계축·1493)년에 만들어진 동활자이다. 자본은 명나라의 새로운 판본인 「자치통감강목」으로 하였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6 2.1㎝, 소자 1.6 1.0㎝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계축자는 갑진자와 같이 바르고 깨끗한 자체이나 세련도는 그보다 훨씬 떨어진다. 갑진자가 너무 작고 획이 가늘어 쉽게 마멸되어서 인쇄가 깨끗하지 못하였으므로 계축자는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대자와 소자를 다같이 크게 만든 것이 그 특징이다. 대자는 극단적으로 굵고 크며, 소자는 갑진자의 대자보다도 자획이 굵은 편이다.

병자자

병자자로 찍은 주자어류 이미지

병자자로 찍은
주자어류

병자자는 중종 11(병자·1516)년과 중종 13(기묘·1519)년에 만들어진 동활자로 기묘자라고도 한다. 당시까지 주로 사용하던 갑인자에 유실이 생기고 닳은 것이 늘어나 중종 10(1515)년 조정에서 당판 「자치통감」의 가늘고 큰 자체를 바탕으로 활자를 새로 주조할 것을 건의함에 따라 주자도감(鑄字都監)의 설치와 그 실천이 하명되면서 보주가 시작되었다.

왕명에 따라 중종 11(1516)년 정월에 주자도감이 마련되고 4월에는 그 일을 맡아보던 관리들에게 승진의 표창까지 하며 활자의 주조를 진행시켰으나 5월에 들어 한발이 심해지자 주자도감이 혁파되고 말았다. 그때까지 주성된 활자가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뒤 중종 13(1519)년 기묘 7월에 지방의 향교에 서책이 너무도 없으므로 서사(書肆)를 설치하고 서적을 간행해낼 활자를 주조하여야 한다는 요청이 있자 소격서와 지방사찰의 유기를 거두어 다시금 금속활자를 만들었으나 후에 서사가 설치되지 못하자 병자자와 합쳐졌다. 활자의 크기는 중자 1.0 1.2㎝, 소자 0.8 0.5㎝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병자자는 활자의 모양이 경자자와 비슷하여 식별이 어려우나 정사하여 보면 자체의 박력이 경자자만 못하다. 병자자도 갑인자와 을해자 및 갑진자의 다음으로 오래 쓰인 활자로 임진왜란 직전까지 70여년간 사용되었다.

경진자

경진자로 찍은 중용혹문 이미지

경진자로 찍은
중용혹문

경진자는 선조 13(경진·1580)년에 갑인자를 두 번째로 주조한 동활자로 재주 갑인자라고도 한다. 대내에 소장한 갑인자본 「대학연의」를 자본으로 하여 선조 13년 정월부터 9개월이 걸려 주성한 것이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4 1.6㎝, 소자 1.4 0.8㎝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경진자는 초주 갑인자에 비하면 주조의 정교도가 떨어져 자체가 투박하고 필획에 박력이 없어 보이나 경진자 이후의 개주 갑인자들보다는 나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진자의 인본은 임진왜란의 발발로 인해 사용기간이 짧아 그 종수가 별로 많지 않다.

을해자체 경서자

을해자체 경서자로 찍은 대학언해 이미지

을해자체 경서자로
찍은 대학언해

을해자체 경서자는 「소학언해」, 「대학언해」, 「중용언해」, 「논어언해」, 「맹자언해」의 국역본 사서와 「효경언해」 등의 국역본 경서를 간행해 내는데 사용된 동활자로 방을해자라고도 한다.

을해자는 세조 원(1455)년에 주조된 이후 약 1세기에 걸쳐 사용되어 오다가 선조 6(1573)년에 보주가 행하여졌다. 그 초인본이 그 해 12월에 심충겸에게 내사한 국역본 「내훈」인데, 보주된 활자보다는 마멸된 본래 활자가 다소 많은 편이어서 그 보주의 규모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보주된 활자는 종래의 투박한 필획에서 벗어나 정연한 것이 특징이다. 국역 경서의 활자도 을해자체를 닮게 주성하였으나, 다른 을해자 보자판과 다른 점은 마멸된 원래 활자가 없고 완전히 새로 주조된 활자로 인출한 점이다.

이 활자는 을해자의 둔탁한 필획과 강희안 필적의 특징이 짙게 나타나는 둥근 필의에서 벗어나 자획이 가늘고 예리하여 둥근 필의가 다소 누그러진 단정한 느낌을 갖게 한다.

또한 활자주조의 솜씨가 정교하여 활자모양이 가지런하고 예쁘다. 국역 경서의 인본은 원래 활자가 하나도 없이 완전히 교체된 새로운 판종의 활자본인 점에서 보주한 을해자본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활자가 언제 어떤 이들이 주관하여 주조되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활자의 크기는 1.2X1.6㎝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가장 먼저 간행된 「소학언해」 권말에 붙은 이산해의 발문에서 선조 18(1585)년에 교정청을 열고 그 다음 해인 선조 19(1586)년 여름에 임금이 교서관(운각)으로 하여금 수백 부를 간행하도록 하명하였다고 밝히고 있어 이 활자는 선조 19(1586)년 이후에 주성되었을 것이다.

인력자

인력자로 찍은 책력 이미지

인력자로 찍은
책력

인력자는 관상감(서운관)에서 일력을 간행하는 데 사용된 철활자로 관상감(서운관)철활자라고도 한다. 인력자는 언제 주성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심수경(1516∼1599)의 「견한잡록」에서 『항상 주자로 책력을 인출하여 서울과 지방에 반포해왔는데 임진왜란 때 서울이 함락되자 책력기구도 모두 없어지고 흩어져버렸다. 그러나이듬해 겨울에 환도하여 보니 인력주자(印曆鑄字)를 수습하여 바치는 이가 있어 이전과 같이 역서를 인출하여 반포할 수 있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주자로 책력을 인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활자의 재료는 무쇠로 여겨지고 필서체의 대자와 소자로 만들어 졌으며 주조가 비교적 정교한 편이다. 활자의 크기는 중자 1.2X0.8㎝, 소자 0.5X0.4㎝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인력자에는 연주활자(連鑄活字)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자주 쓰이는 날짜, 간지, 절기를 비롯한 불의(不宜), 출행(出行), 동토(動土), 목욕(沐浴), 이사(移徙) 등의 활자는 연주활자로 주성되었다.

무오자

무오자로 찍은 서전대전 이미지

무오자로 찍은
서전대전

무오자는 광해군 10(무오·1618)년 7월에 만들어진 동활자로 삼주 갑인자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종래의 주자인쇄 제도를 복구하고자 광해군 9(1617)년에 주자도감을 설치하고 갑인자를 다시 주조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인 광해군 10(1618)년 7월에 완성시킨 활자이나 임진왜란 후의 어려운 사정 속에서 이루어진 개주였으므로 그 규모가 작았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4X1.6㎝, 소자 1.4X0.8㎝이었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갑인자를 개주한 활자 중에서 가장 필획에 박력이 없고 만든 솜씨가 거칠어 인쇄가 깨끗하지 못하다. 무오자는 인본의 활자모양이나 어(於)·소(所)·이(以) 등의 특정한 글자에 의해서도 그 특징이 쉽게 감식된다.

무신자

무신자로 찍은 숙묘보감 이미지

무신자로 찍은
숙묘보감

무신자는 현종 9(1668)년에 김좌명(1616-1671)이 호조 및 병조의 물자와 인력을 이용하여 수어청에서 주성한 대자 66,100여자와 소자 46,000여자의 동활자로 사주 갑인자라고도 한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4X1.6㎝, 소자 1.4X0.8㎝이었다. 무신자는 김좌명이 서거한지 1년 8개월 뒤인 현종 13(1672)년 10월에 교서관(운각)으로 옮겨졌다.

이 활자도 개주 갑인자로서는 정교하지 못하나 삼주 갑인자인 무오자보다는 글자체와 필획에 박력이 있다. 무신자는 주성된 후에 영조말기까지 1세기 동안에 걸쳐 사용되었기 때문에 현종연간(1659∼1674)과 숙종 전기의 인본은 인쇄가 정교하나 그 뒤의 인본들은 부분적으로 보주가 이루어져 특히 영조연간(1724∼1776)에 나온 서적들은 활자가 많이 닳고 이지러지고 목활자가 적지 않게 섞여 인쇄가 조잡한 편이다.

병진왜언자

병자왜언자로 찍은 첩해신어 이미지

병자왜언자로 찍은
첩해신어

병진왜언자는 숙종 2(1676)년에 주성된 동활자로 교서관 왜언자라고도 한다. 병진왜언자는 양파 정태화(1602∼1673)가 현종 11(1670)년 교서관(운각)에서 일본어 학습을 위해 「첩해신어」를 금속활자로 간행할 것을 계청한 후에 그의 서거 6년 후인 숙종 2(1676)년에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자본은 안신휘가 쓴 일본문자 이로하의 히라가나로 하였으며, 활자는 주로 단주활자이나 발음이 붙은 글자는 연주활자로 주성된 것이 특징이다. 활자의 크기는 단자 2.2X1.8㎝, 연자 3.3X1.8㎝이었다. 연주활자에서도 한결같이 똑같은 활자모양이 나타나고 있다.

낙동계자와 현종실록자

낙동계자로 찍은 당송팔대가문초 이미지

낙동계자로 찍은
당송팔대가문초 이미지

낙동계자는 민간의 낙동계라는 사사단체에서 늦어도 현종 14(1673)년 무렵에 주성하여 사용하던 동활자이며, 현종실록자는 숙종 3(1677)년에 「현종실록」을 간행하기 위하여 낙동계의 활자를 구득하고 여기에 새로이 주조하여 섞은 동활자이다.

낙동계자의 자수는 35,830자이었고 새로 주조된 활자의 자수는 40,825자이었으며, 활자의 크기는 대자 1.3X1.4㎝, 소자 0.8X0.7㎝이었다. 현종실록자는 본시 주조의 솜씨가 정교하지 못하나 글자체가 바르고 깨끗하여 조선조 말기까지 역대 실록을 비롯하여 열성어제, 각종 지장 및 많은 일반 서적의 간행에 사용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민속박물관에는 현종실록자의 실물이 남아 있는데 활자의 뒷면은 활등처럼 속으로 움푹 파져있다. 이는 18세기 후기 이후의 활자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청동의 사용량을 절약하면서 반건성 또는 불건성의 점착물을 사용하여 조판을 하는 경우 점착물이 그 속에 들어차면 움직이지 않도록 고안되었던 방법이다.

한구자

재주한구자로 찍은 문원보불 권1 이미지

재주한구자로 찍은
문원보불 권1

한구자는 3차에 걸쳐서 주조된 동활자이다. 초주 한구자는 무신자를 주조하였던 김좌명의 아들 김석주(1634∼1684)가 숙종 초년(1677 무렵)에 당대의 명필가였던 한구(1636∼?)의 독특하고 매력이 있는 소자 필서체를 바탕으로 사사로이 주조한 동활자이다.

재주 한구자는 정조 6(임인·1782)년에 평안도 관찰사였던 서호수(1736∼1799)가 왕명에 의하여 다시 주조한 동활자로 임인자라고도 한다.

삼주 한구자는 철종 9(1858)년 규장각검교제학 김병기, 규장각제학 윤정현과 김병국 등이 왕명에 의하여 다시 주조한 동활자이다. 초주 한구자의 자수는 알 수 없으나, 재주 한구자의 자수는 8만여자였고 삼주 한구자의 자수는 31,829자이었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0X1.0㎝, 소자 0.9X0.5㎝이었다.

초주 한구자는 김석주가 죽은 뒤 별로 이용되지 않고 그의 집에 간직되어 오다가 숙종 21(1695)년 지경연, 박태상의 주청으로 정부가 사들여 서적의 간행에 사용하였다. 초기의 인본은 정교하나 숙종말기 이후 영조 무렵의 인본에서는 활자의 마멸이 생기고 보자가 섞여 인쇄가 깨끗하지 못하다. 이에따라 정조조에 들어와서 다시 주조하여 이를 내각에 두고 사용하였다.

초주 한구자를 닮게 잘 만들었으나 그 중에는 재주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 있어 양자의 식별이 가능하다. 재주 한구자는 정조 18(1794)년에 창경궁의 옛 홍문관 자리에 새로이 설치한 주자소로 옮겨 사용하였는데 철종 8(1857)년에 주자소에 불이 나서 활자가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그 이듬해(1858)에 왕명으로 다시 개주되었는데, 개주된 활자는 자획에 박력이 없고 만든 솜씨가 거칠며 활자체가 정연하지 못하여 별로 이용되지 않았다. 현재 삼주 한구자의 실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간직되어 있으나, 그 인본은 별로 볼 수 없다.

교서관 인서체자

춘추좌씨전 이미지

춘추좌씨전

교서관 인서체자는 2차에 걸쳐서 주조된 철활자로 운각인서체자 또는 운각인서체 철활자라고도 한다. 전기 교서관 인서체자는 숙종 초년(1684 이전)에 교서관(운각)에서 명나라의 인서체 간본을 자본으로 주성한 철활자로 전기 운각인서체자 또는 전기 운각인서체자 철활자라고도 한다.

자수는 알 수 없으나 활자의 크기는 대자 1.0X1.2㎝, 소자 1.0X0.6㎝이었다. 금속활자에 명나라의 인서체가 도입된 최초이며, 활자의 재료가 무쇠였기 때문에 자획이 굵고 활자의 모양이 가지런하지 못하며, 주조한 솜씨도 거친 편이다.

후기 교서관 인서체자는 경종 초년(1723 이전)에 주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철활자로 후기 운각인서체자 또는 후기 운각인서체 철활자라고도 한다. 자수는 알 수 없으나, 활자의 크기는 대자 1.1X1.1㎝, 소자 1.0X0.6㎝이었다. 전기 교서관 인서체자에 비하면 글자체가 정연한 편이고 가로의 획이 가늘어져 인서체다운 모양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활자의 재료가 무쇠였기 때문에 섬세하지 못하고 딱딱한 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초기에 인출한 인본은 인쇄가 깨끗하나, 영조 후기를 지나 정조조로 들어오면서 보자가 많이 혼용되고 활자가 이지러져 인쇄가 조잡해지며, 이러한 현상은 순조조 이후가 되면 더욱 심하였다.

원종자와 숙종자

숙종사로 찍은 어제어필 이미지

숙종자로 찍은
어제어필

원종자는 숙종 19(1693)년에 인조의 부왕인 원종(1580∼1693)이 쓴 글자를 바탕으로 주성한 동활자이다. 활자의 자수는 한글활자를 포함하여 4,605자였으며 활자의 크기는 1.3X1.5㎝이었다. 활자의 주조가 정교하여 원종의 예리한 필서체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숙종자는 숙종 19(1693)년에 숙종의 어필을 자본으로 주조한 동활자이다. 활자의 자수는 알 수 없으나, 활자의 크기는 대자 2.3X2.1㎝이었다. 마치 필서한 것으로 여길 정도로 필력이 정교하게 나타나 있다.

율곡전서자

율곡전서자로 찍은 율곡선생전서 권4 이미지

율곡전서자로 찍은
율곡선생전서 권4

율곡전서자는 홍계희(1703∼1771)가 스승인 도암 이재(1680∼1746)의 「율곡선생전서」를 간행하고자 문하생을 비롯한 벗들과 더불어 사사로이 주조한 철활자로 홍계희자라고도 한다.

활자의 자수는 알 수 없으나, 활자의 크기는 대자 1.1X1.3㎝, 소자 0.7X0.7㎝이었다. 자체는 무영전취진판의 「강희자전」의 글자체를 닮게 쓴 고딕인서체로 생생자와 정리자가 만들어지기 40여년 전에 이미 중국 서체의 영향을 받은 것이 주목된다.

활자는 관서의 주조가 아닌 개인들의 사사로운 주조였기 때문에 기술이 미숙하여 만든 솜씨가 치졸하며 인본도 인쇄상태가 매우 조잡하다.

임진자

임진자로 찍은 아송 권5-8 이미지

임진자로 찍은
아송 권5-8

임진자는 정조가 동궁으로 있던 영조 48(1772)년에 갑인자로 인출한 「심경(心經)」과 「만병회춘」을 자본으로 주조한 15만자의 동활자로 오주 갑인자라고도 한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4X1.6㎝, 소자 1.4X0.8㎝이었다. 임진자는 정조 원(1777)년에 주조한 정유자와 활자모양이 아주 닮아 그 식별이 매우 어려운 편이다.

임진자는 주조되자 교서관(운각)에 두고 정유자는 규장각의 본원(本院)인 내각에 따로 두고 사용하였는데 서적을 간행할 때는 감독을 맡은 각신이 당시 주로 이용했던 임진자, 정유자, 임인자 중 어떤 활자로 할 것인가를 임금에게 품의하여 사용하고 간행이 끝나면 원래 위치로 돌려보내서 간직케 하였다.

특히 정조 18(1794)년에 창경궁의 옛 홍문관 자리에 마련된 주자소로 옮겨진 정유자가 철종 8(1857)년에 화재로 소실되자 그 이후는 오로지 교서관(운각)에 보관된 임진자만 사용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임진자가 소장 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는 임진자 조판의 실물도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정유자

정유자로 찍은 서전대전 권4 이미지

정유자로 찍은
서전대전 권4

정유자는 정조 원(정유·1777)년에 평양감사 서명응(1716∼1787)이 왕명에 따라 15만 여자의 갑인자를 더 주조한 동활자로 육주 갑인자라고도 한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4X1.6㎝, 소자 1.4X0.8㎝이었으며, 자수는 대자가 105,638자였고 소자가 44,532자였다.

정유자는 평양에서 추가로 주조되어 임진자와 합쳐지지 않고 규장각의 본원인 내각에 따로 두고 사용하다가, 정조 18(1794)년에 창경궁의 옛 홍문관 자리에 설치된 주자소로 옮겨졌다.

그 후 철종 8(1857)년에 주자소에 화재가 발생하여 여기에 두었던 활자가 모두 소실되었는데 이때 화재로 소실된 다른 활자는 다음 해에 다시 주성되었으나 정유자만은 주조되지 않았다. 그것은 교서관(운각)에 보관해둔 임진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리자

초추정리자로 찍은 어정대학유의 권8-9 이미지

초추정리자로 찍은
어정대학유의 권8-9

정리자는 2차에 걸쳐서 주성되었다. 정리자라는 명칭은 「정리의궤통편」을 인출하기 위하여 주조한 데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초주 정리자는 목활자인 생생자의 단정하고 인상적인 글자를 바탕글자로 하여 정조 19(을묘·1795)년에 주조하기 시작하여 정조 20(병진·1796)년에 주성된 동활자로 을묘자라고도 한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1X1.3㎝, 소자 0.7X0.7㎝이었으며, 활자의 자수는 대자 16만자와 소자 14만자로 도합 30만자였다. 대자는 글자체가 넓적하고 자획이 굵은 인서체와 같이 정교하고 해정하다.

초주 정리자는 정조 18(1794)년에 창경궁의 옛 홍문관에 새로 설치한 주자소로 옮겨졌는데 철종 8(1857)년에 주자소에 불이 나서 정유자 및 재주 한구자와 함께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재주 정리자는 철종 9(1858)년에 한자활자와 한글활자로 주성된 동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1X1.3㎝, 소자 0.7X0.7㎝이었으며, 활자의 자수는 대자와 소자 89,203자였다. 활자주조의 정교도는 물론 활자의 모양이나 자획의 박력도 초주 정리자에 비하여 떨어진다.

그러나 다른 활자에 비하여 글자체가 보기 좋고 활자의 크기가 적당한 인서체였으므로 구한말까지 학부의 교과서·법령·조약서·관보 등 정부인쇄물의 간행에 주로 사용되었다.

현재 정리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간직되어 있으며, 뒷면이 임진자, 현종실록자, 삼주 한구자와 같이 옴푹 파져 있는데 청동의 사용량을 절약하면서 반건성 또는 불건성의 점착물을 사용하여 판을 짤 때 그 점착물이 그 속으로 꽉 차서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정리자체 철활자

정리자체철활자로 찍은 아희원람 인본 이미지

정리자체철활자로 찍은
아희원람 인본

정리자체 철활자는 정조 말기(1798 무렵)에 민간이 정리자를 닮게 주조한 철활자로 민간 정리자체 철활자라고도 한다. 상업적인 서적의 간행에 사용해 온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누가, 언제, 어디서 만들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활자의 자수는 알 수 없으나, 활자의 크기는 대자 1.1X1.3㎝, 소자 0.7X0.7㎝이었다. 정리자체 철활자는 순조조 이후 구한말까지 호남지방을 비롯한 서울 지방 등에서 문집, 족보, 경서, 훈몽서, 한의서, 역상서, 지리학서, 거의록, 창의록, 충의록, 효행록 및 그 밖의 각종 전기류 등 각계 각층이 필요로 하는 서적을 인출하여 널리 보급하였으며, 그 중에는 간행 의뢰자의 요구에 따라 의뢰처의 간인으로 표시된 것도 볼 수 있다.

정리자체 철활자는 필서체 철활자와 더불어 민간인쇄를 촉진시켜 시민문화와 시민의식의 계발에 기여한 점에서 인쇄문화사상 의의가 크다. 정리자체 철활자의 실물은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을 비롯한 몇 곳에 일부가 흩어져 전래 보존되고 있다.

전사자

전사자로 찍은 금석집10-12 이미지

전사자로 찍은
금석집10-12

전사자는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오빠 박종경이 순조 16(1816)년에 청나라 무영전취진판 「이십일사」의 글자를 자본으로 주성한 인서체 동활자로 돈암 인서체자라고도 한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 1.1X1.3㎝, 소자 0.7X0.7㎝이었으며, 활자의 자수는 한글활자를 포함하여 20만자였다. 전사자는 일가와 친지의 저서를 인출하여 주고 그대로 집에 두었다가 철종 연간에 이곳저곳을 가지고 다니며 민간의 서적을 간행하여 주었다.

대원군이 집정한 대에는 운현궁에 몰수되었다가 대원군이 실각한 뒤에는 다시 이곳저곳에서 민간이 필요로 하는 서적의 간행에 사용되었다. 대원군이 집정한 무렵에 정서류 서적의 간행에 사용된 것을 제외하면 구한말까지 주로 개인의 저서와 편찬서를 비롯한 불교서, 도교서가 간행된 것이 특징이다.

이 활자는 왕실의 외척이 권세를 누리고 있던 무렵, 일가와 친지의 저서와 문집을 간행하여 주며 세도를 부리려고 한데서 주성된 것이지만 뒤에 이르러서는 주로 민간이 필요로 하는 서적을 간행하여 보급함으로써 시민문화와 시민의식의 계발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활자의 모양이 신연활자와 같이 균정하고 크기가 적당하며 주조가 정교하여 민간에서 널리 애용되었다.

필서체철활자

필서체철활자로 찍은 양주조씨족보 이미지

필서체철활자로 찍은
양주조씨족보

필서체 철활자는 순조 초에 민간에서 주조하여 상업적으로 사용해 오던 활자에 사자원의 서체를 바탕으로 주조한 철활자로 민간 필서체철활자라고도 한다. 누가, 언제, 어디서 처음으로 만들었는지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 않아 정식 활자명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활자의 자수는 알 수 없으나, 활자의 크기는 대자 1.1X1.1㎝, 소자 1.0X0.6㎝이었다. 필서체 철활자는 순조조에서 고종조까지 주로 민간의 문집, 족보, 실기, 방목 및 일용의 여러 가지 서적을 고루 간행하는데 사용되었다.

필서체 철활자도 정리자체 철활자와 더불어 민간인쇄를 촉진시켜 시민문화와 시민의식의 계발에 기여한 점에서 인쇄문화사상 의의가 크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래 보존되고 있다.

신연활자자

신연활자로 찍은 성경직해 권1 이미지

신연활자로 찍은
성경직해 권1

신연활자는 19세기 후반에 우리나라에 도입된 서양 근대의 신식연활자이다. 활자의 자수는 알 수 없으나, 활자의 크기는 0.4X0.7㎝이었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서양보다 2세기 정도나 앞섰으면서도 다른 나라와의 교류없이 독자적으로 실시되어 그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했다.

그 결과 근대에 접어들어 새로운 인쇄술을 외국에서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근대인쇄는 고종 17(1880)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최지혁의 글씨를 자본으로 주조한 한글 신연활자로 인출한 「한불자전」이 효시이며, 그 다음해인 고종 18(1881)년에는 「한어문전」이 인출되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고종 20(1883)년에 처음으로 통리아문에 박문국을 설치하고 신연활자를 일본에서 도입에서 도입하여 「한성순보」를 인출하여 발행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공식인 근대인쇄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뒤이어 고종 21(1884)년에 광인사의 인쇄소가 근대식 인쇄시설을 갖추고 서적을 간행하기 시작하여 점차로 근대인쇄가 확산되었다.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운영사업과
  • 담당자 우민석
  • 전화번호 043-201-4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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