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판인쇄술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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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인쇄술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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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목판인쇄술이 성행되기 전에는 필사본을 매개체로 하여 기록문화가 전파되고 발달되었다.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발명된 초기의 목판인쇄술이 우리나라로 전파되자, 이를 토대로 우리 실정에 맞도록 수용하고 발전시켜 우리나라 고유의 목판인쇄출판문화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목판인쇄출판문화의 발전상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있어서 목판인쇄술이 정확하게 언제 발생하였는지에 관하여는 자세하지 않으나, 대체로 통일신라시대에 불경의 보급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늦어도 삼국시대에는 서적문화가 발생하여 처음에는 돌에 새기거나 직접 종이에 기록하였으며, 목판인쇄술은 통일신라 말기에 나타난 새로운 기술이었다. 그 배경은 대외적으로는 당시 동양에서의 문명국의 위치가 불교문화의 수준여하에 따라 좌우되었던 만큼 신라의 국제적 경쟁정책에 호응하여 불교문화가 발달하였던 데에 있었으며 국내적으로는 불교를 이상으로 하였던 신라가 자주적 토대를 마련하려는 국가정책이 융성한 불교문화와 영합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목판인쇄술이 사용되기 전에 금석류나 기물류 등의 표면에 문자나 도상을 조각하고 그것을 탁인하는 방법들이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기술은 석판에 장문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정교하게 쓰고 새기거나 금판과 동판에 글자를 새기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마침내 목판의 평면에 글자의 획과 그림을 반대로 새겨 다량으로 찍어내는 방법과 기술을 수용하여 목판인쇄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인장류는 물론 불상과 탑을 새긴 탑인과 불인에 주먹을 칠하여 종이나 겸백에 다량으로 찍어내는 방법도 목판인쇄술을 싹트게 하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와 같이 동양에서의 조각기법, 날인방법 및 사용목적 등은 목판인쇄술을 싹트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고유하고 발전된 한지제작기술을 비롯하여 인쇄에 필요한 우수한 먹과 먹물을 일찍부터 생산해 낸 것도 목판인쇄술을 싹트게 하는 데에 큰 구실을 하였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이미 먹이 생산되어 이것이 중국으로 공출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송연먹과 유연먹 등의 우수한 먹이 생산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는 목판인쇄술이 시작될 수 있는 전제적인 여건이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 완비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초기 형태의 인쇄지식과 기술이 싹트자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에 전파되어 수용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우리의 고유한 목판인쇄출판문화로 토착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무구정광다라니경 이미지

무구정광다라니경

751년 이전 통일신라.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출토된 소형 두루마리 다라니경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다.

삼국시대의 저술

삼국시대에 이미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한 저술이 적지 않았으나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별로 없다. 그것은 일찍부터 목판인쇄술에 의한 출판에 착수하지 않은 탓이었다. 삼국시대에 간행된 서적 중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당나라의 천축삼장(天竺三藏) 미타산(彌陀山)이 왕명으로 한역한 것을 신라에서 간행한 [무구정광대다리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며, 이는 현존하는 세계최고(最古)의 목판본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간행시기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의 학자들간에는 학설이 분분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751년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은 불국사 석가탑이 건립된 시기가 신라 경덕왕 10(751)년이며, 가람이 중건될 때 탑이 부분적으로 보수되었다 하더라도 탑 속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들어있던 주요 사리장엄구는 그 조형양식과 특징이 신라시대에 납탑공양된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또한 경문에는 당대의 측천무후(則天武后·690∼704)가 집권하고 있을 때 새로이 만들어 쓴 무주제자(武周製字)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광곽의 높이가 5.3∼5.5㎝로 출입이 있고 각 항의 자수는 7∼9자로 출입이 있으며, 극히 소형의 고졸한 권자본으로서 납탑공양을 위하여 간행된 것이었다.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은 함통(咸通) 9(868)년에 간행된 목판 권자본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의 크기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4배에 달하고 판식과 판면 등의 여러 가지 특징이 송대에 간행된 일반 경전과 비교해 볼 때,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발전된 형태이다.

이는 개인이 양친을 위해 사사로이 간행한 불경으로, 수록된 불화는 섬세하고 정교하게 판각되어 있어 후대의 발전적 요소가 크게 부각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간본 형태의 불화로서는 가장 정교한 천하일품의 고판화이다.

일본에 현존하는 770년경에 간행된 [백만탑다라니(百萬塔陀羅尼)]는 다량으로 소요되는 다라니를 일일이 손으로 필사하는 대신 불인류(佛印類)의 날인방법을 그 간행에 적용시킨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초기적인 치졸한 단계이며, 본문이 비교적 짧은 다라니를 불인류의 날인방법으로 간행하여 납탑한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보다 뒤에 간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판각술과 자체는 물론 인쇄기술도 사뭇 미숙하고 치졸하여, 가치면에서는 우리나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는 비교의 대상도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목판인쇄술의 성격을 완전히 갖춘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본에 해당하며, 그 예스럽고 우아하고 정교한 정도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우리민족의 발전된 목판인쇄출판문화의 수준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본다면, 우리나라는 적어도 8세기 초에는 목판인쇄술이 시작되었고, 통일신라말기에 서적을 간행한 사정은 중국 당대 말기의 그것과 비교하여 전혀 손색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

우리나라의 목판인쇄술은 고려시대로 계승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고려는 개국 후에 관제를 정비하면서 내서성(內書省)을 두었다가 성종조에 이르러 비서성(秘書省)으로 개칭하였다. 비서성은 국가의 중요한 문서와 유학의 경서 등을 비롯한 각종의 서적과 문서들을 보관하고 관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련의 국가문서를 편찬하는 부서였던 만큼, 실제적으로 전국적인 목판인쇄출판사업을 담당하고 조직하는 중앙기관이었다.

비서성 내에는 비서각(비각)을 설치하여 전국 각지에서 출판되는 서적들을 보관하는 국가중앙도서관의 기능을 수행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많은 판목들을 비치하여 두고 비서성으로 하여금 직접 목판인쇄출판사업을 수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후에는 비서성에 문적이 쌓여 훼손될 지경에 이르자 목판인쇄출판기관을 확장하기 위하여 국자감 내에 새로이 서적포 (書籍鋪)를 설치하고 판목을 옮겨 널리 서적을 인출하여 배포하도록 하는 조치도 취하여졌던 것이다.

또한, 비서성의 산하기관으로 서적점(書籍店)을 두었는데 고려시대 말기에 이르러 서적원(書籍院)으로 개칭되었다. 서적원은 금속활자인쇄출판업무를 주관한 부서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인쇄출판사업의 결과로 고려시대에는 서적소(書籍所), 문덕전(文德殿), 청연각(淸 閣), 보문각(寶文閣), 천장각(天章閣) 등의 주요한 장서시설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외침과 국내의 정변으로 인하여, 그 동안에 간행되었던 서적을 비롯한 많은 귀중한 인쇄출판문화유산들이 탕진되거나 소실되고 말았다.

[보협인다라니경]

고려시대 목판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목종 10(1007)년에 개성 총지사(摠持寺)에서 간행된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一切如來心秘密全身舍利寶 印多羅尼經)]이다.

이 [보협인다라니경]의 형태는 신라시대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보다 소자로 간각되어 작은 목심축에 감겨진 권자본이다. 이는 본래 사리외합에 넣어 불탑에 봉안하기 위하여 간행된 것인 듯, 표지에 의한 보호와 장식도 없고 권서도 구비되지 않은 소박한 장정으로 되어 있다.

[보협인다라니경]을 간행하여 납탑공양하는 불사는 중국의 오나라와 초나라에서 유행하였는데, 고려가 주로 그들 나라와 불학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고려 초기에 [보협인다라니경]을 간행하여 납탑한 불사도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보협인다라니경]의 권수에는 변상도가 있는데 그 묘사는 자세하고 실감이 있게 정각되어 있으며, 권수제를 비롯하여 본문은 각 줄에 평균 9자씩 배열되어 있는데 자체는 구양순체의 방필에 원필이 가미된 사경체이다. [보협인다라니경]은 글자 하나 하나는 물론 전체의 인쇄가 깨끗하고 선명하여 전반적으로 우아하고 미려하다. 고려 초기의 목판본으로서는 보기 드문 진본으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정교도에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밖에,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여러 사찰에서 각종의 불교경전이 상당히 발달된 수준의 목판인쇄로 간행되었다. 그 구체적인 사례는 3차에 걸친 대장경의 조조(雕造)와 간행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초조대장경]

고려 성종 때에 중국의 북송에서 간행된 거질의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版大藏經)]이 우리나라에 수입되었다. 인쇄출판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고려는 중국에 이어 대장경을 간행하여 국위를 선양하고자 다짐하였던 것이다.

현종 2(1011)년에 거란이 수도 개경까지 침입해 들어오자 대장경을 조조하여 불력으로 그들을 물리치고자 거국적으로 발원하여, 현종 2년 무렵에 조조에 착수한 것이 바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다. [초조대장경]의 조조는 현종 2(1011)년에 시작되어 선종 4(1087)년에 이르기까지 76년이 걸려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그간에 계속된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현종조와 문종조에서 이루어졌으며, 문종 말년에 들여온 [송조대장경]은 선종 초기까지 추가로 조조되었다. [초조대장경]은 도합 570함에 그 권수는 무려 6,000권에 이르고, 그 수록의 범위는 당시까지 개판된 대장경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한역의 정장(正藏)이었다.

이들 경판흥왕사 등의 대장전에 간직되어 오다가 어느 때에 대구의 부인사(符仁寺)로 이관되어 소장되었으며, 그것이 고종 19(1232)년에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초조대장경]의 조조는 국난으로부터 구국하기 위하여 발원하고 착수한 것이나 그 발원에는 우리민족이 대장경을 조조하여 문화민족으로서의 위력을 떨쳐 다른 민족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욕심도 있었던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동양 초유의 방대한 한역장경으로 번역문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정교하게 쓰고 새긴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우리나라 목판인쇄술의 우수성을 돋보이게 한 참으로 진귀한 국보적인 인쇄출판문화유산인 것이다.

[교장]

고려 선종 4(1087)년에 [초조대장경]의 조조가 일단락 된 후에, 문종 후기부터는 그 정장에 대한 신구찬술(新舊撰述)의 제종교장(諸宗敎藏)과 소초(疏抄)의 수집이 문종의 넷째 왕자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의천은 19세 되던 문종 28(1674)년에 요와 송에서 경론과 소초를 구하여 일장으로 모아 유통시킬 것을 상소하였으며, 열심히 정장의 소초를 구집(購集)하여 선종 7(1090)년에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상·중·하 3권을 편찬하였다.

이에 수록된 교장은 도합 1,010부 4,857권의 방대한 양에 달하고 있다. 교장의 거의 반이 수대와 당대를 전후한 중국 학문승들의 것이고 우리나라의 신라와 고려의 학문승들의 것은 많지 않으나, 동양 학문승들의 연구 저술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집성하여 간행하고자 편찬한 목록이었다는 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의천의 [교장(敎藏)] 조조사업은 선종 7년(1090) 8월에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편찬한 이후, 책을 구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유람을 하고 돌아온 다음 해(1091)의 봄부터 착수하여 그가 입적한 다음 해인 숙종 7(1102)년 초에 일단락이 되었다. [속장경] 전질의 조조 여부에 대하여는 학설이 분분하나, 인쇄기술사적인 면에서 [교장(敎藏)]이 지닌 특징과 우수성은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이 대체로 각 줄에 14자씩 배열되어 있는 반면, 본 [교장(敎藏)]은 각 줄에 20-22자씩 배열되어 글자가 아주 작고 빽빽한 것이 특징이다. [교장(敎藏)]은 고려의 독자적인 개판본이라는 점에서도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을 능가하는 우수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목판인쇄술을 대표하는 수준급의 작품인 것이다.

[재조대장경]

고려 고종 18(1231)년에 몽고군이 국도에까지 침략해 오자 고려의 조정은 하는 수 없이 그 다음 해(1232)에 강화로 피난하여 그 곳을 임시 수도로 삼고 외침에 대항하였다. 바로 이 때에 대구의 부인사에 소장되었던 [초조대장경판]은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외침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다시 대장경을 조조하여 불력으로 수호를 비는 것이 최상의 방책임을 깨닫고 거국적으로 발원하여 국난 중의 역경에도 불구하고 대장도감을 두고 재조를 결행하여 성취시킨 것이 바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며 이 경판은 현재 합천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다.

[재조대장경]의 조조는 고종 23(1236)년에 착수하여 16년이 지난 고종 38(1251)년에 완성된 것이다. [재조대장경]은 북송의 [개보칙판대장경]을 바탕으로 누락, 오역, 착사 등으로 인하여 내용에 차이가 있는 것은 거란본과 국내본의 대장경을 중심으로 새겨서 추가하거나 대체하였으며 그 뒤의 것은 [송조대장경]을 바탕으로 새겨서 수록하고 있다. 정장의 조조 이외에도 장소류(章疏類)와 승전류(僧傳類) 등의 보유판이 개판되었는데 그것은 고종 35(1248)년에 주된 조조사업이 일단락 된 이후에도 계속되어 고종 38(1251)년에 마무리되었다.

[재조대장경]이 조조되자 그 경판은 강화도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수장되어 충숙왕 때에까지 이르렀고 그 뒤 어느 때에는 선원사(禪源寺)로 옮겨졌다가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러 오늘날의 합천 해인사로 이관되었던 것이다.

[재조대장경]은 형태적으로 상하단변에 판심이 없는 권자본의 판식이며, [초조대장경]과 같이 각 줄에 14자씩 배열되어 있고 자체도 대체로 구양순체의 방필이다. [재조대장경]은 판식과 자체가 [초조대장경]과 비슷하나 [초조대장경]을 그대로 번각한 것은 아니다.

[초조대장경]을 저본으로 [송조대장경]과 [거란대장경]의 대교는 물론 각종의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까지 참용하여 본문의 오탈과 착사를 철저하게 교정하고 보완한 다음에 번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의 한역대장경 중에서는 본문이 가장 잘 보수되어, 오탈이 적은 훌륭한 불교경전임이 국내외의 학계에서 인정되고 있다. 중국, 일본 등에서 본 [재조대장경]을 정본으로 삼아 계속하여 대장경을 간행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우수한 목판인쇄술을 바탕으로 왕실에서 수만권의 서적을 간행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송에서는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서적을 구하기도 하였다. 목판인쇄술은 금속활자인쇄술이 발명된 후에도 목판보존의 용이함과 지속적인 인쇄 및 세밀한 그림이나 지도 등을 다양한 방법으로 전환하여 판각할 수 있는 유리한 점으로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그 전통이 계승되었다.

조선시대

고려시대의 목판인쇄술은 그대로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더 한층 발전을 거듭하였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각 지방별로 많은 서적들이 인쇄되고 출판되었음은 우리가 주지하는 바이다.

조선시대 목판인쇄술의 전반에 관하여는 조선시대의 여러 책판목록(冊版目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목판인쇄를 통하여 서적을 간행한 인쇄출판문화의 양상을 개판처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함경도

함경도에서는 12개 지역에서 156종의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함경도에서의 목판본 간행지역은 함경감영, 경성, 함흥, 길주, 단천, 문천, 북청, 안변, 정평, 종성, 홍원, 회녕 등이었다. 특히 함경감영에서는 97종의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평안도

평안도에서는 11개 지역에서 234종의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평안도에서의 목판본 간행지역은 평안감영, 영변, 평양, 성천, 중화, 관서절도영, 강서, 상원, 용강, 자산, 함종 등이었다. 특히 평안감영에서는 54종, 영변에서는 70종, 평양에서는 71종의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황해도

황해도에서는 11개 지역에서 137종의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황해도에서의 목판본 간행지역은 해주, 황해감영, 연안, 황해병영, 곡산, 봉산, 서흥, 수안, 재녕, 평산, 황주 등이었다. 특히 해주에서는 76종의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강원도

강원도에서는 14개 지역에서 121종의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강원도에서의 목판본 간행지역은 원주, 강릉, 정선, 강원감영, 간성, 삼척, 양양, 영월, 이천, 철원, 춘천, 평해, 회양, 횡성 등이었다.

경기도

경기도에서는 10개 지역에서 124종의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경기도에서의 목판본 간행지역은 광주, 북한산, 삭녕, 경기감영, 강화, 개성, 수원, 양주, 인천, 장용영 등이었다. 특히 광주에서는 53종의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서울

서울에서는 11개 지역에서 140종의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서울에서의 목판본 간행지역은 사역원 , 교서관(운각), 관상감, 봉모당, 주자소, 군기시, 내부, 장악원, 종부시, 혜민서, 훈련도감 등이었다.

충청도

충청도에서는 26개 지역에서 514종의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충청도에서의 목판본 간행지역은 충청감영, 청주, 임천, 충주, 노성, 연산, 괴산, 단양, 면천, 문의, 보녕, 보은, 신창, 연기, 예산, 옥천, 정산, 제천, 진산, 천안, 청풍, 태안, 한산, 홍산, 홍주, 회덕 등이었다.

경상도

경상도에서는 63개 지역에서 2,082종의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경상도에서의 목판본 간행지역은 경상감영, 경주, 대구, 밀양, 상주, 선산, 성주, 안동, 예안, 의성, 진주, 청도, 합천, 영주, 영천, 김해, 함안, 함양, 고성, 예천, 인동, 거제, 거창, 안의, 영해, 울산, 창원, 칠곡, 풍기, 하동, 현풍, 흥해, 개녕, 경산, 고령, 곤양, 군위, 금산, 남해, 단성, 동래, 봉화, 비안, 사천, 산청, 삼가, 순흥, 신녕, 양산, 언양, 영남우절도영, 영덕, 용궁, 의녕, 의흥, 지례, 창녕, 청송, 초계, 칠원, 통영, 하양, 함창 등이었다.

특히 의성에서는 55종, 선산에서는 62종, 청도와 합천에서는 68종, 밀양에서는 82종, 예안에서는 89종, 상주에서는 105종, 성주에서는 123종, 진주에서는 132종, 대구에서는 154종, 경주에서는 183종, 경상감영과 안동에서는 192종의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전라도

전라도에서는 55개 지역에서 1,097종의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전라도에서의 목판본 간행지역은 전라감영, 광주, 나주, 남원, 순천, 전주, 제주, 태인, 금산, 능주, 담양, 영암, 용담, 남평, 동복, 무안, 무주, 무장, 보성, 순창, 여산, 영광, 장흥, 창평, 해남,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강진, 고부, 고산, 고창, 곡성, 광양, 구례, 금구, 김제, 낙안, 대정, 부안, 옥과, 옥구, 용안, 운봉, 익산, 임피, 장성, 장수, 정읍, 진안, 진원, 함평, 호남좌절도영, 화순, 흥덕, 흥양 등이었다.

특히 나주와 순천에서는 50종, 전라감영에서는 54종, 광주에서는 64종, 남원에서는 73종, 제주에서는 79종, 전주에서는 240종의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이를 통하여 보면, 조선시대에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전체 213개 지역에서 무려 4,605종의 서적이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 간행된 서적을 8도로 나누면 평균 580종에 이르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목판인쇄출판문화가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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