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북동토성은 그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초기 토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정북동토성의 둘레는 약 675m로 동벽 185m, 서벽 165m, 남벽 155m, 북벽 170m로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입니다.

성벽의 높이는 2.7~4.5m 정도로 사다리꼴 형태의 성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벽 내부에는 나무 기둥을 세운 후 모래와 진흙을 번갈아 다져가며 쌓는 판축기법板築技法을 활용하여 축성되었습니다.
정북동토성에는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여러 특징이 확인되었습니다. 성문은 네 성벽의 중앙에 하나씩 두어 4개를 시설하였습니다. 이중 북문과 남문의 경우 양 끝의 성벽이 어긋난 형태로 축조되어 성문을 방어하는 시설인 옹성의 초기 형태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토성의 네 모서리와 성문 사이마다 성벽이 돌출된 곡성曲城이 12곳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치성雉城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정북동토성의 방어력을 한층 높여줄 수 있는 또 다른 시설로 너비가 다른 2줄의 해자垓字도 확인되었습니다. 1차 해자가 성벽 바로 외부에 접하여 한 줄을 돌아가고 있으며, 이후 성벽 외부에 대한 보수하면서 2차 해자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한편 정북동토성은 세 차례에 걸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북동토성이 축성되기 이전으로 집터와 나무울타리木柵가 조성되었던 청동기시대입니다. 청동기시대 송국리형집자리와 토성 남벽 안쪽을 따라 나무울타리를 세운 기둥구멍柱穴이 간격을 두면서 확인되었습니다. 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의 생활공간으로 자리하였으며, 어느 시점에 나무울타리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초기철기시대의 우두머리세력首長層이 소유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세형동검細形銅劍의 검파두식劍把頭飾이 출토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정북동토성을 처음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2~3세기의 원삼국시대입니다. 해자의 바닥에서 4세기대 청주 봉명동유적 시기의 둥근밑단지圓低短頸壺가 출토되었습니다. 청주 봉명동유적은 백제의 청주 진출과 관련이 있는 청주 신봉동 고분군 이전 단계로 백제가 청주 지역으로 진출하기 전부터 정북동토성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후삼국시대에 궁예와 견훤이 활동했던 9~10세기대입니다. 정북동토성에 대해 기록한 사료史料로 조선시대 영조시기의 승려 영휴靈休가 저술한 󰡔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가 있습니다. 사료에서는 궁예가 거처하던 상당산성을 견훤이 빼앗은 이후 정북동토성을 축조하여 곡식을 저장하여 상당산성으로 들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후삼국시대에 정북동토성이 곡식을 임시 저장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남쪽 성벽 외부의 해자를 폐기한 후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집터가 확인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