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소개

동지명유래

주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행복한 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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궝말 / 정말

'궝말'은 현재의 영운동 2통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영운동에서 금천동으로 넘어가는 소로(小路)에 있었다고 한다."정말"이라고도 한다.'궝말'의 '궝'은 중세국어 '구'(구석)으로까지 소급한다.'구' 이 '구억'으로 변한 뒤 축약되어'궉'이 되고 이어서 '말'의 'ㅁ'에 동화되어 '궝'이 된 것이다. '구→구억→궉→궝'의 변천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구 '은 '구석'으로 직접 변하여 쓰이기도 한다. '말'은 지명의 후행 요소로서 '마을'을 지시한다. 그러니 '궝말'은 '구석에 있는 마을로 해석된다. 마을이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국에 '궝말'이라는 마을은 많다. 지역에 따라서는 '구억말', '궉말','구석말','국말','정말'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말'은 '궉말'로부터 변형된 것이다. '궉말'이 '적말'로 변한 뒤어 'ㅁ'에 동화되어 '정말'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정말'도 '궉말'과 같이 '구석진 마을로 해석된다.강서동의 '궝말'을 참조하라.

난민주택(難民住宅)

'난민주택'은 생이 위에 있는 주택지이다. 6.25때 월남한 피난민들이 살던 주거지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툼벙

'바위툼벙'은 영운동에 있던 물엉덩이이다. '바위'와'툼벙'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의 23통과 19통 사이가 된다. '바위'는 구체적으로 웅덩이안에 있던 '장수바위'를 가르킨다.'툼벙'은 '둠벙'의 변형이다.'둠벙'은 '웅덩이'의 충청 방언이다. 따라서, '바위툼벙은 '바위가 있는 물웅덩이로'로 해석된다. 웅덩이에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웅덩이에는 '장수바위'라는 큰 바위와 더불어 그 앞에 자그마한 바위가 하나 더 있었다.이 작은 바위가 보통때는 물에 잠겨 있다가 물이 빠지면 그 모습을 약간 드러냈다. '장수바위'는 아이들이 무자맥질하던 곳이다.

비석거리(碑石거리)

'비석거리'는 영운동에 있는 마을이다. 어느 절도사(節道使)의 비석이 서있던 거리여서 '비석거리' 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비석거리'는 거리 이름이 아니라 마을 이름으로 쓰인 것이다. '비석거리'에 마을이 조성되자 거리 이름으로 마을 이름을 삼아 그렇게 부른 것이다. 우암동에도 '비석거리'라는 마을이 있다.

샘말

'샘말'은 아랫영우리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의 16통 입구에 해당된다. '샘'이 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생이/사양리(斜陽里)

'생이'는 영운동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의 7,8,9,10,11통 지역에 해당한다. '사양리(斜陽里)라고도 한다. 마을 생성 초기에는 20여 호 정도가 몰려 살았다고 한다. '생이'는 '사양이'가 줄어든 어형이다. 음운론적으로 '사양이'가 줄어들어 '생이'가 될 수 있고, 또 '사양이'와 '생이'가 함께 쓰이는 지역이 있으므로'생이'가'사양이'로부터 나왔다는 설명은 타당하다. '사양이'는 '사양'에 접미사'-이'가 결합된 어형이다. '사양'과'사양이'는 마을 이름으로 많이 쓰인다. 또한 '사양'은 '사양골','사양보','사양산','사양소류지','사앙재'등에서 보듯 지명의 선행 요소로 쓰여 다른 지명을 만드는 데에도 이용된다. '사양'은 한자'斜陽(해질 무렵에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이다. 비탈이 져서 해가 비스듬히 비치는 곳을 '사양' 이라 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양'이'斜陽'이고'사양'에 접미사'-이'가 결합된'사양이'로부터 '생이'가 나온 것이므로'생이'또한' 해가 비스듬히 비치는 마을'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 이 마을은 산밑 양지쪽에 자리잡아 해가 잘 비쳤다고 한다. 그리고'생이'가 선행하는'생이골','생이덤','생이뜸','생이물','생아봉,'생이바우'등의'생이'도 해가 비스듬히 비치는 양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생이'를 포함하는 지명에서는 '생이'를 '상여'(행상)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소전(-廛)

'소전'은 바위툼벙 옆에 있던 우시장이다. 지금의 은하아파트 옆이 된다. 우시장은 본래 남주동에 있었는데 영운동에 있는 지금의 시장주유소 뒤로 옮겼다가 다시 바위툼벙옆으로 옮겨 온 것이다. 우시장은 다시 모충동을 거쳐 운천동으로 이전하였다.

송장골/송정골

'성장골'은 생이(사양리)뒤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청남초등학교 뒤가 된다.'송정골'에 대해서는 '송장' 을 '죽은 사람의 몸뚱이'로 보고 송장을 묻던 골짜기 여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이 골짜기에 어린아이를 많이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전국에 '송장골'이라는 골짜기 이름이 아주 흔한데 대부분 이와 같은 유래설이 결부되어 있다. '송정골'에 대해서는 '송정'을'松亭'으로 보고 소나무 정자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실제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전국에'송정골'이라는 지명도 대단히 많다. 대부분'소나무정자'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지역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하층의 무식한 사람들은 '송장골'이라는 지명을 쓰고, 글깨나 하는 유식한 사람들은'송정골'이라는 지명을 썼다고 한다. '송정골'과 '송장골'을 별개의 지명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송장골'과 '송정골'은 별개의 지명이 아니라 '송장골'로부터 '송정골'이 나왔든지, 아니면 '송정골' 로부터 '송장골' 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원현이 어떤것인지는 분간하기 어렵다.

아랫영우리/바깥영우리

'영오리'는 영운동 2통과 3통 지역을 가리킨다. '영우리'라고는 하는데 이것이 '영우리'보다 더 많이 쓰인다. '영오리'를 '永五里'로 이해하고 있으나 '영오리'의 어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지역을'穎雲(영운)이라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영운'에서 '영우'가 나오고 '영우'가 '영오'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하나, 이것도 분명한 것은 아니다. 전국에 '영오리'라는 지역이 몇 군데 확인된다.

안생이

'안생이'는 영운동에 있는 마을로 현재의 13.14.20,22통 지역이다. '안'[內]과 '생이'로 나우어 이해할 수 있다. '생이'안쪽 골짜기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생이' 는 다른 지역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 독특한 지명이다. 그러나 '안생이고','안생이논'등에서 보듯 지명의 선행 요소로 쓰일 만큼 아주 일반화된 지명이다. [영오리/영우리]

영오리/영우리

'영오리'는 영운동 2통과 3통 지역을 가리킨다. '영우리'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영우리'보다 더 많이 쓰인다. '영오리'를 '永五里'로 이해하고 있으나'영오리'의 언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지역을 '穎雲(영운)이라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영운'에서 '영우'가 나오고 '영우'가 '영오'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하나, 이것도 분명한 것은 아니다. 전국에 '영오리'라는 지역이 몇 군데 확인된다.

영운교(永雲僑)

'영운교'는 영운천에 놓여 있는 다리이다. 영운동에 213번지에 해당하며 길이가 30m이다.

영운천(永雲川)

'영운천'은 용암동과 용정동에서 발원하여 무심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내이다.

웃영우리/안영우리

'웃영우리'는 영우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 영운동 1,23,24통 지역이다. '안영우리'라고도 한다. '웃영우리'는 영우리의 위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안영우리'는 영우리의 안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수바위

'장수바위'는 바위둠벙에 있던 큰 바위이다. 바위가 장수처럼 크고 우람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암동의 '장수바위'를 참조하라.

팔각정(八角亭)/팔모정(八牟亭)

'팔각정'은 윗영우리에 있던 정자이다. '팔모정'이라고도 한다. 이종만이라는 사람이 양어장을 만들고 여기에 지은 정자이다. 6,25전까지 이 정자에서 관내 기관장들이 모여 유흥을 즐겼다고 한다. 지금은 택지로 개발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