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래

미소로 나누고 친절로 베푸는 행복한 금천동
우리동소개 동유래

금천동(金川洞)

  • ''금천동'은 본래 청주군(淸州郡) 동주내면(東州內面)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쇠내개울 옆에 있는 지역이어서 '쇠내개울', '쇠내', 금천(金川)이라 하였다. 1914년 일제(日帝)의 행정 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탑동리(塔洞里)·문외리(門外里)·구하리(九下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금천리(金川里)라 명명하고 사주면(四州面)에 편입하였다. 1920년 청주읍에 편입하면서 탑동(塔洞)과 금천동(金川洞)으로 분리하였다.

금천공동묘지(金川共同墓地)/사태밑공동묘지(-共同墓地)

  • '금천공동묘지'는 사태밑 건너편에 있는 공동묘지이다. '사태밑공동묘지'라고도 한다.

꽃산(-山)/화산(花山)

  • '꽃산'은 현재의 혜원학교 남동쪽에 있는 산이다. 일명 '화산'(花山)이라고도 한다. 봄이면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꽃산'이라 했다는 유래설이 전하나 과연 '꽃'[花]과 관련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 '꽃산'은 본래 '곶뫼' 또는 '고지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추정하는 것은, '꽃산'이라는 지명에는 대체로 '곶메', '고지메'와 같은 속지명이 대응되어 쓰이는 지역이 많기 때문이다. '곶뫼', '고지뫼'의 선행 요소 '곶' 또는 '고지'는 '산이 평야를 향해 죽 뻗어 나온 지형(쑥 튀어 나온 부분)'을 특별히 이르는 고유어이다. '뫼'는 '山'을 뜻하는 고유어로 지명에 따라 '메', '매'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곶' 또는 '고지'와 '뫼'의 본래 의미를 고려하면, '곶뫼' 또는 '고지뫼'는 '평야를 향해 길게 내려온 형상을 하고 있는 산'으로 해석된다.
  • '곶뫼' 또는 '고지뫼'의 '곶'과 '고지'는 지명에 많이 나타나나 웬만한 전문 지식이 없으면 그 어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곶'과 음이 유사한 '花'의 '곶>꽃'으로 오인하기가 쉽다. 그 결과 '꽃뫼'라는 단어가 잠시 나타났을 것이다.
  • 이 '꽃뫼'는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후행 요소만 바뀌어 '꽃산'이 되기도 하고, 선행 요소와 후행 요소가 모두 바뀌어 '화산'(花山)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꽃산(-山)'이나 '화산'(花山)은 '꽃뫼'에 대한 한자 표기에 불과하다.
  • 결국, '꽃산'은 '곶뫼' 또는 '고지뫼'로까지 소급하며, 산이 평야를 향해 죽 뻗은 형상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실제 이 산의 형상과 부합한다.

벌뜰

  • '벌뜰'은 지금의 영운동 동사무소 앞에 있던 들이다. 과수원과 자갈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벌뜰'은 '벌들'의 된소리 발음이다. '벌들'은 '벌판인 들'로 해석된다. 들이 벌판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국에 '벌들'이라는 지명이 널리 분포한다.

벌뜸

  • '벌뜸'은 벌뜰에 있던 마을이다. 지금의 11통 지역이다. '벌'은 '벌판'의 뜻이고, '뜸'은 '작은 마을'의 뜻이다. 따라서 '벌뜸'은 '벌판에 있는 작은 마을'로 해석된다. 집이 벌판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태밑/새터밑/새태밑/사태/새터

  • '사태밑'은 꽃산 밑에 형성된 마을이다. '새터밑', '새태밑', '사태', '새터'라고도 한다. '사태밑'은 '사태'와 '밑'으로 분석하여 이해할 수 있다. '사태밑'의 '사태'1)에 대해서는 몇 가지 어원설이 전한다.
  • 첫째는 '삼태기'가 변한 것으로 보는 설이다.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여 삼태기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한 해석으로 '삼태기'가 '사태기'로 변한 다음 '사태'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사태밑'은 '삼태기 밑'이 되어 아주 이상한 지명이 된다. 더군다나 '삼태기>사태기>사태'의 변화는 음운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설은 취하기 어렵다.
  • 둘째는 '사태'를 '사태(沙汰)가 나다'의 '사태'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럴듯한 이야기까지 결부되어 있다. 이 지역은 사금이 많이 나와 사금을 채취하던 곳인데, 사금을 캐느라고 파 놓은 모래가 장마 때면 넘쳐나 '사태'가 자주 발생하자 그 말로 동네 이름을 삼았다는 것이다. 장마 때면 쌓아놓은 백사가 흘러 넘치는 경우가 많아 '사태'라는 말을 많이 썼으리라는 것은 얼마든지 추정해 볼 수 있으나, 그 말이 마을 이름으로까지 확대되어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설도 따르기 어렵다.
  • '사태밑'의 '사태'는 '새터'의 변형으로 추정된다. 실제 이 지역을 '새터'라고도 하므로 '사태'와 '새터'의 관계는 부정할 수 없다.
  • '새터'는 '새로 잡은 터(마을)' 아니면 '사이에 조성된 터(마을)'로 해석해 볼 수 있다.2) 두 해석 중에서는 후자의 해석이 더 어울린다. 왜냐하면 이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인 형상이어서 산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사태'를 '새터'의 변형으로 보면 '사태밑'은 본래 '새터밑'이었을 것이다. '새터밑'이라는 지명이 함께 쓰이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새터밑'이 '새태밑'을 거쳐 '사태밑'이 된 것이다. 전국에 이들 '새터밑', '새태밑', '사태밑'이라는 지명이 공히 존재한다. 이들은 '밑'에서 'ㅌ'이 탈락한 '새터미', '새태미', '사태미'로도 나타난다.
  • '새터밑'은 '새터 밑에 있는 마을'로 해석된다. '새터밑'에서 변형된 '새태밑'이나 '사태밑'도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새터' 밑에 마을이 조성되자 그렇게 부른 것인데, 그렇다면 '새터밑말'이 더 구체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은 쓰이지 않는다.
  • 이 지역을 '새터', '사태'라고도 하는데, '새터'는 '새터밑'에서 '밑'이 생략된 지명으로 볼 수 있고, '사태'는 '사태밑'에서 '밑'이 생략된 지명으로 볼 수 있다.

생이모퉁이

  • '생이모퉁이'는 금천동에서 영운동으로 돌아가는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다. 이 지명은 '생이'와 '모퉁이'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생이'3)는 영운동에 있는 마을이다. 단어 뜻에 충실하면 '생이모퉁이'는 '생이에 있는 모퉁이'로 해석된다. 이 모퉁이에 마을이 생기자 모퉁이 이름으로 마을 이름을 삼아 그렇게 부른 것이다.

쇠내개울/시내개울/금천(金川)/명암천(明岩川)

  • '쇠내개울'은 청주의 상당산성(上黨山城)에서 발원하여 금천동을 지나 무심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시내개울', '금천'(金川), '명암천'(明岩川)이라고도 한다.
  • '쇠내개울'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다음과 같은 지명 전설이 전해 온다.
  • 한양을 향해 길을 떠났던 나그네 한 사람이 쌀안[米院]에서 하룻밤을 묵고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 청주성 남문 밖 합수머리에서 발을 담그고 여독을 풀고 있었다. 맑고 시원하게 흐르는 잔여울 모래 속에 발을 묻고 앉아 있으려니 오랜 발걸음으로 인한 여독이 한꺼번에 밀어 닥쳐 물에 발을 담근 채 괴나리봇짐을 베고 오수를 즐기게 되었다.
  • 피로에 지친 몸에 덮쳐든 졸음 속에서 나그네는 누렇게 물든 서쪽 하늘에서 까마귀 떼들이 하늘을 덮으며 머리 위를 맴도는 데 기겁을 하고 잠을 깼다. 무척 오래된 잠인 줄 알았으나 실은 담배 한 대 피울 사이밖에 되지 않았다. 나그네는 몹시 불쾌한 듯 고개를 흔들며 발을 물 속에서 빼어 내려고 일어나 앉았다. 물속에 잠긴 두 발 사이에는 곱고 하얀 모래가 엷게 덮여 있었는데, 나그네는 얼핏 양 발 사이에 고여 있는 모래 속에서 둔탁한 황금색 모래가 왕모래에 끼어 고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 그것은 틀림없는 금이었다. 갑자기 황금을 물속에서 발견한 나그네는 설레는 가슴을 억누르고 근처에 있는 협곡을 파서 적당량의 토사를 함지에 담아 일어 보았다. 그러자 뜻하지 않게도 많은 양의 금이 나왔다. 나그네는 정신없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몇 군데의 흙을 시세(試洗)해 보니 많은 양의 금이 섞여 있었다.
  • 이렇게 되자 나그네는 한양 가기를 포기하고 이곳에 막장을 친 뒤 덕대(德大)4)를 구해서 금점판(金店販)5)을 이루기 시작했다. 금은 합수머리에서 시작해서 북쪽으로 목암산 호암리 방면의 하천을 중심으로 해서 상당량이 매장되어 있었다. 나그네는 두더지처럼 들과 하천변을 일구었다.
  • 마침내 이와 같은 소문은 팔도 각지에 퍼져 많은 덕대들과 금쟁이들이 이곳으로 모여 들었고, 근처 일대에는 객줏방과 술집, 밥집이 늘어서게 되어 일대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부터 합수머리에서 호암리에 이르는 하천을 '금이 나오는 내'라는 뜻으로 '쇠내개울'[金川]이라 불렀다.
  • 위의 전설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쇠내개울'이 '금이 나는 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은 인정할 만하다. 이 지역이 오래 전부터 '금'이나 '철'과 무관하지 않은 지역으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까지도 개울 상류에 금광이 있었고, 또 그 내에서 사금을 채취했으며, 얼마 전까지도 장마철이면 붉은 쇳가루 물이 흘러 넘쳤다고 한다. 이곳에 대한 한자 지명이 '金川'인 것도 '쇠내개울'이 '金'과 인연이 깊은 곳임을 알려 준다.
  • '金川'이라는 한자 지명은 18세기의 『輿地圖書』(여지도서)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이 책에는 '金川'이 '청주 동쪽 5리에 위치하며 청토(靑土)라는 토산물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청토'는 흙 속의 철 성분이 환원 작용을 거쳐 생긴 흙이어서 이 지역이 '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려 준다.『大東地志』(대동지지)에는 '철'이 청주의 토산물임이 분명히 지적되어 있다. 이로 보아 '金川'이라는 한자 지명이 '철' 또는 '금'과 관련해서 나온 지명임이 분명해진다.
  • 이 '金川'에 대한 속지명이 '쇠내'이다. 그런데 이 '쇠내'의 문헌적 용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金川'이라는 한자 지명이 일찍부터 존재했고 또 그 자체가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쇠내'라는 속지명이 아주 이른 시기부터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쇠내'라는 하천 이름은 바로 개울에서 '쇠' 즉 '금'이나 '철'이 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 그런데, '쇠내'를 '새내'가 변한 것으로 보고 '쇠가 나는 내'가 아니라 '동쪽에 있는 내'로 해석하려는 시도6)도 있다. 이러한 시도는 '쇠내'가 예전에 청주군(淸州郡) 동주내면(東州內面)에 속해 있던 지역이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청주로 보아 동쪽에 위치한 내여서 동(東)을 뜻하는 '새'를 이용하여 '새내'라고 했다가 우연히 '쇠내'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내'에서 변한 '쇠내'를 토대로 '金川'이라는 한자 지명을 잘못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쇠내'의 '쇠'를 '東'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쇠내'가 '새내'의 변화형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다. 본래 '새내'였다면 '새내'로 남아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할 터인데, '쇠내'로 대표되고 있는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새'와 '쇠'가 구전되는 과정에서 발음상 넘나든다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어떤 구체적인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새'가 '쇠'로 변하기는 어렵지 않나 한다.
  • 두 번째로, 다른 지역에 존재하는 '쇠내'라는 지명에 대한 해석 문제이다. 이것은 '쇠내'라는 지명이 전국 여러 곳에 산재해 있고 또 그 역사가 깊은데 '쇠내'를 일률적으로 '새내'의 변형으로 해석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청주시 외평동(外坪洞)에 있는 '쇠내'를 금천동의 '쇠내'와 같이 '동쪽에 있는 내'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곳은 청주의 북쪽인 청주군 북강내일면(北江內一面)에 속해 있던 지역이어서 '쇠내'를 '동쪽을 흐르는 내'로 해석할 수 없다. 이곳의 '쇠내'에서도 얼마 전까지도 사금을 채취하였다고 하니 '금을 캐는 내'인 '金川'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외평동의 '쇠내'가 '금을 캐는 내'라면 이 '쇠내'와 발원지(즉, 상당산성)가 같은 금천동의 '쇠내'도 같은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 '쇠내'가 '쇠'와 '내'가 결합된 어형이라면, '쇠내개울'은 '쇠내'에 '개울'이 덧붙은 어형이다. '내'와 '개울'이 동일한 의미이니 '쇠내개울'은 같은 의미의 단어가 이중으로 결합된 동의중복형 지명이다. '쇠내'라고만 해도 하천을 지시하는 데에 문제가 없는데 굳이 '개울'을 첨가하여 '쇠내개울'이라는 또 다른 명칭을 만든 것은, '쇠내'가 하천 이름에서 마을 이름으로 전용되어 쓰임으로써 하천 이름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자 그것이 하천임을 분명히 지시하기 위해서이다.
  • '쇠내'는 하천 이름보다는 냇물이 통과하는 지역(즉, 금천동) 이름으로 더 일반적으로 쓰인다. 이에 대해 하천은 '쇠내개울'로 바뀌어 쓰인다. '쇠내개울'은 엄밀히 말해 '쇠내 지역을 통과하는 개울'로 해석된다. 그리고 '시내개울'은 '쇠내개울'에 대한 다른 발음이다.
  • '쇠내'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한자 지명인 '金川'도 하천 이름으로 쓰이다가 마을 이름으로 바뀌어 쓰인다. '金川洞'의 '金川'이 바로 그것이다. 고유어이든, 한자어이든 하천 이름이 그와 관련된 마을 이름으로 전용되는 일은 흔하다.
  •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쇠내개울'의 본래 이름은 '쇠내'이다. '쇠내'는 '쇠가 많이 나는 내'라는 뜻이다.
    2. '쇠내개울'은 '쇠내 지역을 통과하는 개울'이라는 뜻이다.
    3. '金川'은 '쇠내'에 대한 한자 지명이다. 본래는 하천 이름이나 지금은 마을 이름으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