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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래

사창동

사창동은 청주군(淸州郡) 서주내면(西州內面)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조선 시대 이곳에 사창(司倉)이 있었기에 '사창'이라 한 것이다. 1914년 일제(日帝)의 행정 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내수동(內水洞)을 합하여 사창리(司倉里)라 명명하고 사주면(四州面)에 편입하였다. 1963년 청주시 구역 확장에 따라 사창동(司倉洞)으로 바꾸어 청주시에 편입하였으며, 그일부는 사직동에 병합하였다.

내수동

구렛논은 아랫내수동에 있던 논이다. 지금의 충북대학교 중문(中門)에서 동쪽이 되는 지역이다. 땅이 깊고 물이 많은 '구레'가 있는 논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농사가 잘 되던 논이었다고 한다.

내수동/내수동고개

내수동은 천수동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의 사창시장 일대를 가리킨다. '내수동'은'내수'와 '동'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내수'라는 지명은 전국에 몇 곳이 존재한다. 대체로 '內首' 또는 '內水'로 쓰고 있는데, '內首'인 경우에는 '안머리', '內水'인 경우에는 '물안'이라는 속지명과 대응 되어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곳의 '내수'는 '천수동'(天水洞)안쪽이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內水'일 가능성이 높다. '내수동'은 이 '내수'에 마을을 지시하는 '洞'이 결합된 어형이다. '내수동'은 그 위치에 따라 '웃내수동'과 '아랫내수동'으로 나뉜다. '내수동고개'는 내수동에 있는 고개이다. 현재의 사직파출소로부터 시계탑 방향으로 구도로(舊道路)로 넘어가는 고개를 가리킨다. '내수동'에 있는 고개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궁무리상/궁머리상/말구무리/말구머리

궁무리산'은 현재의 청주과학대학 입구에 있는 산이다. '궁머리산', '말구무리', '말구머리'라고도 한다. 이들 여러 지명 중 '궁무리산'이라는 지명이 가장 일반적으로 쓰인다. '궁무리산'은 일단 '궁무리'와 '산'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궁무리'는 다시 '궁'과 '무리'로 나뉜다. '궁'의 어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두 가지 관점에서 그 어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창방죽/방죽골

사창방죽'은 사창동에 있던 방죽이다. 지금의 창신초등학교 운동장 부지에 해당한다. 사창동에 있던 방죽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방죽골'은 지금의 창신초등학교 밑에 있는 마을이다. 사창방죽 밑에 조성된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창터/창말(倉-)/사창(司倉)/사창리(司倉里)

사창터'는 예전 사창(社倉)이 있던 자리이다. 지금의 청주주님의교회 자리가 된다. '사창'(社倉)은 '조선 시대에 각 고을에 환곡을 저장하여 두던 곳집'이다. 이 사창이 있던 자리여서 '사창터'라 한 것이다. '사창' 주변에 마을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창말'이다. '창말'은 지금의 청주주님의교회(사창동 259-12) 일대의 마을을 가리킨다. '사창'(司倉) 또는 '사창리'(司倉里)라고도 한다. '창말'의 '창'은 '倉'으로 '곳집'을 뜻하며 '말'은 '마을'을 뜻한다. 그러니 '창말'은 '창고가 있는 마을'로 해석된다. 조선 시대 이곳에 군량미를 저장하던 창고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사창', '사창리'라는 다른 지명도 같은 이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자남마을

프레드릭 오자남과 소르본 대학생들에 의해 1833년 파리에서 창설된 빈체시오 아 바오로회는 빈체시오 아바오로 성인의 덕성을 본받아 곤경에 처해 있는 이웃에게 봉사하는 평신도 공동체로서 한국에서는 1961년 청주 교구에서 시작되어 1975년 전국 이사회가 발족되었다. 1966년 7월19일 뉴질랜드의 지원을 받아 프레드릭 오자남 신부가 주축이 되어 청주교구 사직동(현재 사창동)에 대지 3,000여평을 매입, 집이 없는 가난한 이웃에게 주택을 지어주는 등 빈민구제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프레드릭 오자남 신부의 이름을 붙여 현재의 오자남 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다.

질막고개/질막재

'질막고개'는 천수골과 복대공동묘지 사이에 있던 고개이다. '질막재'라고도 한다. '질막고개'는 '질마고개'에 'ㄱ'이 첨가된 어형이며, '질마고개'는 '길마고개'의 구개음화 어형이다. '길마고개'는 아주 흔한 고개 이름이다. '길마고개'의 '길마'는 '짐을 실으려고 소의 등에 얹는 안장'이다.
따라서, '길마고개'는 '길마처럼 생긴 고개'로 해석된다. '길마'처럼 높고 가파른 고개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길마고개'가 '질마고개'로 변하고 이것이 다시 '질막고개'로 변한 것이 되므로, '질마고개'나 '질막고개'는 '길마고개'와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질막재'는 '질마재'의 변형이다. '질막고개'에 유추되어 '질마재'의 '질마'를 '질막'으로 바꾼 어형이 '질막재'이다. '질마재'는 '길마재'로 소급한다. '길마재'의 구개음화 어형이 '질마재'인 것이다. '재'는 '고개'의 뜻이니 '길마재', '질마재', '질막재'는 '길마고개', '질마고개', '질막고개'와 동일한 의미로 해석된다. 전국에 '길마재', '질마재'라는 고개 이름이 아주 흔하다. '길마재'나 '질마재'에 '고개'를 덧붙여 '길마재고개', '질마재고개'라는 지명도 쓰인다.
'길마'는 '재'나 '고개'뿐만 아니라 '바위'(길마바위), '봉'(길마봉), '산'(길마산) 등과도 결합한다. '길마바위', '길마봉', '길마산' 등도 '길마'처럼 생긴 지형에 근거하여 만든 지명이다. '질막고개'는 질막고개에 있던 마을이다. '질막재'라고도 한다. '질막고개'나 '질막재'는 본래 고개 이름이나 여기서는 마을 이름으로 쓰인 것이다.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을 그 고개 이름을 다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천석골

천석골'은 현재의 중앙여자고등학교 뒤편에서 서북 간에 있는 마을이다. '천석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지명 전설이 전한다. 고려 말기 이곳에 서씨(徐氏)라는 부자가 살았는데 그의 재산은 놀랍게도 깨를 천석이나 뿌릴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하여 근처 마을 사람들은 흔히 서씨를 가리켜 '서천석'(徐千石)이라 불렀다.
그러나 서씨는 그 많은 농토를 관리하는 것이 귀찮았고, 따라서 늘 피로함을 느끼고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들과 밭 그리고 논으로 나가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고 물을 대는 일이 되풀이되자 농사에 흥미가 없어진 것이다.
그는 마침내 편히 앉아 먹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고 편한 생활을 희구하게 되었다. 서천석은 온종일 뒷산 우마고개[牛馬峙]에 올라가 넓디넓은 자기 소유의 전답을 바라보며 일하지 않고 편하게 앉아 먹고 살 궁리를 하는 것으로 매일매일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승 한 분이 찾아 들어 시주를 청하였다. 그러자 서천석은 시주는 하지 않고 도승이거든 술수를 써서 일하지 않고 편하게 살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노승은 자기가 도승은 아니나 그만한 부탁은 들어줄 수 있다고 하며 사흘 뒤에 다시 찾아올 터이니 장정 서른 명만 모아 놓으라고 하였다.
서천석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편하게 살도록 해 준다는 말에 혹하여 근동 마을 장정 서른 명을 놉을 얻어 구해 놓았다. 이윽고 약속된 날이 되자 어김없이 노승이 나타났다. 노승은 서른 명의 장정을 데리고 우마고개에 올라가 마소허리[馬牛腰]에 해당하는 산의 허리 부분을 끊어 길을 내었다. 한참 산을 끊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우연히 그 곳을 지나던 풍수(風水)가 잠시 지형을 살피고 나서 자못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노승을 조용히 불러 물었다.

"이 산은 우마혈이어서 항상 재물을 등에 가득 실은 우마가 밑에 있는 서천석 집으로 들어가는 형세인데 어찌 그 말의 허리를 끊어 재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려 하느냐?" 그러자 스님은 서천석이 자청한 일이니 어찌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풍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서천석을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마을로 들어가 서천석을 직접 만나보고 난 풍수는 다시 노승에게로 찾아와 "내가 그를 스님 손에서 구해볼 생각으로 만나 보았는데 역시 운이 다한 것을 알았으니 스님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스님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기도 서천석의 운이 다한 것을 알기에 우마혈을 끊는 것이라 하고, 다음날 산 능선을 완전히 끊어 길을 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부터 서천석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영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는 재물이 있다고 해서 교만한 행동을 한 자에 대한 멸망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서천석이 살던 마을을 천석꾼이 살던 곳이라 하여 '천석골'이라 부르고 있다. 위의 지명 전설에 따르면, '천석골'은 서씨(徐氏)라는 천석꾼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 된다. 전국에 '천석골'이라는 지명이 대단히 많은데, 대부분 이와 같이 마을에 천석지기가 살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는 '천석꾼'이 날 명당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거나 땅이 기름져 천석꾼이 부럽지 않게 곡식이 많이 나는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 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천수골/천수동

천수골'은 지금의 중앙여자고등학교 뒤편에 있는 마을이다. '천수동'(天水洞)이라고도 한다. '천수골'의 '천수'는 '天水'로 '天水沓'(오직 빗물에 의해서만 경작할 수 있는 논)의 준말이다.
'골'은 '골짜기' 또는 '마을'의 뜻이니, '천수골'은 '천둥지기가 있는 골짜기 또는 마을'로 해석된다. 실제 이곳에는 비가 와야 농사를 짓는 '천수답'이 많았다고 한다. '천수동'은 '천수골'의 '골'을 '洞'으로 한자화한 지명이다. 전국에는 '천수'라는 마을 이름이 몇 군데 확인된다.
'천수'는 '천수골'을 비롯하여 '천수답', '천수들', '천수배미', '천수보', '천수봉' 등에서 보듯 다른 지명을 만드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이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