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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래

사직동(社稷洞) 유래

  • 사직동은 청주시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동은 무심천을 경계로 서문동, 서는 사창동, 남은 모충동, 북은 운천동이 접해있는 곳으로 본래 청주군 서주내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 이곳에 사창이 있었으므로 사창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의 폐합에 따라 내수동(內水洞)을 합하여 사창리라 하여 사주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청주시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사창리 일부를 분할하면서 이곳에 있는 사직단의 이름을 따서 사직동이라 하였습니다.
  • 그후 도시팽창및 인구증가에 따라 1982년 9월 1일자로 사직1동과 2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무심천의 유래

  • 사실 무심천만큼 그 이름이 자연스럽게 명명된 내는 없다고 본다. 그것은 어쩌면 대중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말과 말, 사람과 사람으로 번져진 인위가 전혀 가미되지 않는 순수한 우리말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평소에는 흐름이 완만하고 물량도 많지 않으나 우기가 닥쳐오면 범람하고 노도의 물세가 양편의 전답을 씻기는 것은 물론, 사람을 앗아가는 형국이 벌어져도 하늘의 빗줄기는 그치지 않고 내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무심한 세상을 한탄하게 된다. 인생과 흐르는 물결은 그 행로가 불연속선으로 변하기 쉬운 한숨소리와 같기 때문에 청주의 무심천도 하늘을 원망하는 자조적인 이름 으로 비교적 자주 하다 보니 누가 명명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세인들의 입에 닿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근접한 이야기이다.

무심천의 전설

  •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다가 청주에 들러 정진원의 한 여인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 뒤 이 선비가 과거에 합격하고 돌아가는 길에 들르니 그 여자는 이미 변심 하여 있었다. 이를 한탄하여 읊은 시 문구 가운데 무심이란 말이 있어서 무심천의 지명 유래가 되었다고도 한다. 썰은 삼국이래로 청주를 상당이라 했으니 상당을 중국의 상당에 비하고 그곳의 양두산 동남으로 유입하는'심천(深川)'을 본따서 '심천(深川)'이 '심천(沁川)' 으로 동음이 자화되었다는 내용도 있다.지금 중앙공원에 있는 압각수에 얽힌 이야기를 보면 홍수로 유로가 바뀌고 하상이 몇질로 파였다. 이로 인하여 본래의 다리는 홍수로 떠내려가고 천명도 여말에는 심천으로 바뀌었다. 그때의 유로는 남문에서 북문을 관통하여 깊은 내가 생겼다. 그리하여 그때 사람들이 명하기를 지프내(깊은내)라 불렀고 한자로는 沁川으로 기술했다. 이때 대홍수로 범람하여 하나는 지금의 사직동으로 곡류하고 또 하나는 우암산변을 거쳐 내덕동을 곡류하여 신봉동 명심산에서 합수하여 본류를 이루는 것이 옛날의 유로였다. 1906년의 대홍수때 청주가 물바다가 되자 일인들은 정지작업과 제방공사를 시작하여 지금의 무심천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새로 막은 제방이름을 무성 뚝 또는 무심뚝이라 불렀으니 곧 무심천이라는 이름은 1923년 이후부터 부르게 된 셈이다. 결론적으로 둑의 이름인 무심뚝이 무심천으로 그 이름이 굳어졌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