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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 의병장의 유적지

한봉수 의병장의 유적지

위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학평리 85-4

상세정보

한봉수(韓鳳洙 1883~1973)는 청주시 내수읍 세교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8월 진천군 문백면에서 일본 헌병 중위 등 3명을 사살한 것을 시발로 해서 1909년 문경에서 40여명을 사살하고 망명을 기도하다가 서울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일제의 소위 합방대사령으로 출옥할 때까지 괴산 유목리ㆍ미원ㆍ낭성의 가래올ㆍ장호원ㆍ횡성ㆍ전의ㆍ목천 등 충청도와 강원도 등지에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4년간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34회의 전투를 통해 사살70여명, 무기노획 80여정, 현금 탈취 77만원 등의 혁혁한 공과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무적장군이란 별칭을 가진 그는 1909년 3월 청주시 초정리 전투에서 일본군 중대장 이또오를 사살하고 보급탄환을 탈취하였는데 이때 이또오를 사살한 초정리 약수탕 뒷산 바위를 지금도 「한봉수 바위」라고 부르고 있어, 그의 행적을 알수 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손병희와 밀의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선언서를 배부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4월 2일 세교리 장터에서는 내수보통학교 학생 80여명과 선생 엄익래를 계몽하여 주민들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 청주지부에서 보안법 위반 및 연속 범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는 등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여러 차례 체포되어 경찰서 유치장에서 혹독한 고문 및 옥고를 치르었다.

해방 후에는 청주시 상당구 내덕동에서 청빈하게 살다가 1973년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고 청주시 중앙공원에 공적비를 세워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관련 이미지

  • 한봉수 의병장의 유적지 사진1
  • 한봉수 의병장의 유적지 사진2
  • 한봉수 의병장의 유적지 사진3
  • 한봉수 의병장의 유적지 사진4

비중리 석조일광삼존불상

비중리 석조일광삼존불상

위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중리 207-1번지

종류

청주시의 지정문화재

상세정보

내수에서 초정약수로 가는 도로변에 있는 비중리의 속칭 "선돌거리"에 있는 일광삼존석불(一光三尊石佛)이다. 하나의 광배(光背) 안에 3구(軀) 불상을 함께 부조한 것으로 현재 이 불상은 4조각과 파손된 것을 복원하여 놓았는데 본존(本尊)의 몸통과 머리부분이 분리되고 우협시보살상(右協恃菩薩像)떨어져 나간 것을 수습하여 접합하였으나 좌협시보살상(左協恃菩薩像)은 아직 찾지 못하였다.

본존불은 결가부좌한 좌상으로 좌상(坐像)으로 머리부분과 어깨에서 가슴부분까지는 탈락이 심하지만 당당하고 부드러운 조각수법을 보여주며 무릎은 넓지하게 표현되고 무릎 위로 옷자락을 내려뜨리고 있어 백제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과 매우 비슷한 형태이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들어 둘째 손가락을 구부린 시무외인(施無畏印)을 나타내고 있으며 좌수(左手)는 무릎 위에 얹는 모습이지만 마멸이 심하여 잘 알아볼 수 없다. 법의(法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보이는데 어깨와 가슴부분이 심하게 마멸되어 뚜렷하지 않고 무릎 이하에 드러난 의문(衣紋)은 매우 부드럽게 표현되었다. 무릎을 걸쳐내린 상현좌(裳懸座) 아래에는 삼존불상(三尊佛像)이 조각되어 있고 그 좌우로 각각 사자상(獅子像)이 한 마리씩 배치되어 있지만 마멸이 심하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은 몇 겹의 둥근 무늬를 물결식으로 표현하였고, 둘레에는 10구의 화불(化佛)이 표현되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얼굴에 마멸은 있지만 고졸한 미소가 입가에 보이며, 길게 내린 머리카락과 원통형의 체구, 그리고 X자형의 옷무늬 등이 6세기 보살상에서 보이는 특징으로 이 불상의 조성시기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관점이 되고 있다. 이 불상은 삼국시대인 6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이라는데는 학자들이 견해가 대체로 일치하고 있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운데 어느 소속인지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데, 신라불상으로 보는 설이 역사지리적인 환경이나 조각수법으로 보아서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된다.

을축갑회도 및 죽림갑계문서

을축갑회도 및 죽림갑계문서

위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원통리 401번지

종류

청주시의 지정문화재

상세정보

청주지방에 살던 인조(仁祖) 3년 을축생(乙丑生,1625)11명의 선비가 36세가 되던 현종(顯宗) 1년(1660)에 친목모임을 조직하고 을축갑계(乙丑甲契)라 하였다. 계원은 이후직(李後稷)·변숙(卞潚)·지성구(池聖龜)·신영식(申永植)·왕린(王潾)·민광도(閔光道)·민광시(閔光時) 등으로 평생을 두고 신의가 두터웠다.

그 후손들도 이들의 뜻을 받들어 친교를 이어 나갔으며 북일면 입동리에 죽림영당(竹林影堂)을 세워 후세에 전하였다. 을축갑회도는 숙종12년(1686)에 계원들의 62세가 되는 가을에 중국 당나라 낙양의 기영회(耆英會)의 고사와 같이 화상(畵像)을 그려 각기 나누어 가진 것으로 계원 7명이 청주 보살사(菩薩寺)를 배경으로 나란히 앉아 있고 그 앞에 자손들이 시립(侍立)하고 있는 모습을 부모산 부도암(浮屠庵)의 의인화상(義人和尙)이 그린 기념화(記念畵)이다. 계문서는 변숙이 작성한 갑계기(甲契記) 와 송시열(宋詩烈)이 지은 발문(跋文), 이후직이 쓴 화상설(畵像設), 변숙과 왕린이 각각 쓴 갑회도설(甲會圖說), 그리고 축시(祝詩)등이 있다. 계원들이 지켜야할 규약12항목으로 부모나 부인이 상을 당하면 서로 왕래한다는 등 상부상조의 내용과 모임의 운영에 관한 일을 주내용으로 하고 있다.

죽림영당은 북일면 입동리 문지골에 있었으나 1979년에 공군비행장 건설로 철거되어 후손들이 매봉산 기슭의 현위치에 영당을 옮겨 세웠으며 봄. 가을에 제향하고 있다.

삼세 충효문

삼세 충효문

위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중리 111-1번지

종류

청주시의 지정문화재

상세정보

삼세충효문은 조선 숙종(肅宗) 43년(1719)에 여진족과 싸우다 전사한 경흥부사(慶興府事) 충정공(忠貞公) 퇴수헌(退修軒) 나사종(羅嗣宗, 1440~1491)의 충절을 기리어 세운 충신각(忠臣閣)과 인조(仁祖) 16년(1638)에 나운걸(羅云傑, 1456~1493)과 그의 아들 빈(濱, 1473~1495) 린(潾, 1475~1495) 형제의 효성을 기리어 세운 삼효각(三孝閣)을 합하여 부르는 2개의 정려각이다.

나사종은 성종(成宗) 22년(1491) 여진족이 기병(驥兵) 5천을 거느리고 변방에 쳐들어왔을 때 아군 50여명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그의 아들 운걸은 여진정벌에 백의종군하였으나 부친의 원수를 갚지 못함을 비분하여 부친의 3년상을 마치는 날 자결하였고, 운걸의 아들 빈, 린 형제도 효성이 깊어 수차례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친의 3년상이 끝나는 날에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어 3세대가 모두 기일(忌日)을 같이하는 충효의 선례를 남겼다.

나사종은 숙종 43년(1717)에 여진정벌의 공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정(忠貞)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 빈과 린은 숙종 33년(1707)에 판서로 추증되었다. 현재 마을 입구에 동향으로 세워져 있는 이 삼세충효문은 충신각과 삼효각이 나란히 남아 있고 이들 둘레에 담장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학평리고인돌

학평리고인돌

위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학평리

종류

선사유적

상세정보

학평리 마을 동쪽의 구릉지에 있던 고인돌로서 농로를 개설하면서 파괴되어 길옆에 방치되었던 것을 1997년에 문의 문화재단지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이 고인돌이 있던 곳은 본래 성황당이라 불리던 곳으로 고인돌 개석(蓋石)을 제단으로 이용하여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에 동제(洞祭)를 지냈었다고 전해진다.

고인돌은 현재 1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개석만이 남아있다. 개석의 윗면에는 10개의 성혈(性穴)이 잇어 이 돌을 대상으로 하여 민간신앙이 행하여졌음을 나타내준다. 개석의 하부구조는 이미 파괴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크기는 가로 200cm, 세로 120cm, 높이 40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