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골마을

함께 웃는 청주 든든한 이웃, 행복한 용암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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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이정골마을 이미지

안녕하십니까!
이정골에 방문 하신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희 마을은 도시와 가까운 거리이면서도 인심이 온후하고 정이 넘쳐나는 마을로 이웃과 한 가족처럼 지내는 충효의 마을입니다.
또한 우리 마을은 친환경적 농법인 유기농으로 농약을 적게 사용하여 질좋은 농작물 수확을 목표로 마을주민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홈페이지를 방문하신 네티즌 여러분을 위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토록 항상 노력할 것을 주민모두 약속 드리겠습니다. 늘 귀댁에 좋은 일만 가득하시기를 바라며 즐거운 홈페이지 방문 되십시요!
감사합니다

마을유래

이정골고개 유래

  • 구중고개(이정골고개) : 옛날에 중이 넘어 다니던 고개라 하여 붙여졌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 중엽에 청주에 낙향해서 살던 이참판의 딸이 머슴을 사모하다가 상사병이 되고 말았다. 머슴은 奴主의 分義를 지켜야 한다고 간곡하게 달랬으나 막무가내였다. 이에 머슴은 집을 나와서 보살사의 중이 되었다. 그녀는 절까지 좇아왔다. 머슴은 그녀를 데리고 나와 중고개에 이르러 이루어 질 수 없는 처지를 슬퍼하며 함께 목을 매고 죽었다. 이 일을 알게 된 주지스님은 참회의 마음을 이길 수 없어서 스님들에게 이 고개의 통행을 금했다고 한다

지명유래

가니봉(-峰)

  • '가니봉'은 이정골 뒤에 있는 산이다. 이정골에서 가장 높다. 산봉우리의 모양이 '갓'처럼 생겨서 '가니봉'이라 했다고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가니봉'은 '가니'와 '봉'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가니'는 '가니골', '가니끝', '가니산', '가닛재', '가닛포' 등에서 보듯 지명의 선행 요소로 적극적으로 쓰인다. 그러나 그 어원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가니골'이 '세곡동'(細谷洞)과 함께 쓰이는 지역이 있으므로, '가니'를 '細'의 '가늘다'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니봉'은 '가는봉'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가는골', '가는들', '가는등', '가는벌', '가는보', '가는샘' 등에서 보듯 '가는'이 지명의 선행 요소로 적극적으로 쓰이므로, '가는봉'의 존재를 얼마든지 가정할 수 있다. 이 '가는봉'은 '가느다란 봉우리'로 해석된다. 그런데 '가는봉'에서 직접 '가니봉'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가는봉'이 먼저 '가느봉'으로 변한 뒤에 '가니봉'이 나온 것이다. '가느'를 포함하는 '가느골', '가느내', '가느새', '가느실' 등과 같은 지명이 다수 존재하므로 '가느봉'의 존재도 가능해진다. '가는봉'이 '가느다란 모양의 봉우리'이니 '가느봉'이나 '가니봉'도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 '가니봉'이 높고 뾰족한 형상을 하고 있어서 '가느다란 모양의 봉우리'라는 해석과 부합한다.

가죽나무들

  • '가죽나무들'은 이정골 앞에 있는 들이다. 들에 '가죽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죽나무'는 '참죽나무', '죽나무'라고도 한다. '가죽나무'를 이용한 지명에는 '가죽나무거리', '가죽나무골', '가죽나무모랭이', '가죽나무배기', '가죽나무보' 등도 있다. '가죽나무'라는 단어가 지명에 적극적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죽나무보(-洑)

  • '가죽나무보'는 가죽나무들에 있는 보(洑)이다. 가죽나무가 있는 보(洑)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구중고개/이정골고개

  • '구중고개'는 재떨이에서 이정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정골고개'라고도 한다. 이 고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지명 전설이 전한다.
  • 조선 중엽 광해군(光海君) 때, 청주 고을에 낙향한 한양 벼슬아치 가운데 호조참판을 지낸 이참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외동딸 운선(雲仙)은 그 집 하인으로 일하는 상백(相百)이라는 젊은이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으나, 양반이라는 지체 때문에 감히 의중을 전하지 못하고 상사(相思) 지경에 빠졌다. 마음의 병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면서 헤어날 길이 없는 운선 아씨는 마침내 말못할 고뇌를 안고 병석에 몸져 눕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참판은 의원을 불러 병맥(病脈)을 살피도록 하고 무당 판수를 불러 병마를 쫓도록 굿을 하는 등 병 고치는 데 최선을 다했으나 백약이 무효로 운선의 병은 조금도 회복되지 않았다.
  • 이때 경기도 용인에 명의(名醫)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참판은 자초지종을 소상하게 적은 서신을 상백 하인에게 들려 그 명의를 초청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 운선은 동구 밖 성황당 있는 곳에서 상백을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스스로가 앓고 있는 병세가 다름 아닌 상백으로 인한 상사병이라는 것을 밝히고 함께 도망가서 살자는 뜻을 전했다. 운선 아씨로부터 사연을 고백받은 상백은 크게 놀라서 자기와 같은 미천한 하인 놈하고 그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양반의 손에 죽도록 만드는 것 외에 아무 성사도 없다고 하며, 그 길로 혼자 도망을 쳐 용바위골 낙가산(洛迦山) 기슭에 있는 보살사(菩薩寺)로 들어가 불가(佛家)에 귀의하기로 결심했다.
  • 이때에 보살사 주지승 보현(普賢) 스님은 상백의 뜻이 일시적인 고뇌 탈피를 위한 흥분에서 온 것으로 간파하고 조용히 보름 동안을 객방에 둔 뒤 마음이 변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상백의 뜻이 초지일관(初志一貫) 변함이 없자 마침내 길일(吉日)을 택하여 삭발을 하고 정각(正覺)이라는 법명(法名)을 내려주어 수도의 길로 인도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주지스님을 따라 시주를 나온 상백은 공교롭게도 청주성에 들어와 때마침 연연탐색(戀戀探索)하고 있던 운선 아씨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토록 병이 되도록 상백을 찾고 있던 운선은 그날 밤 보살사 수행방(修行房)을 찾아가 상백에게 그 동안 보고 싶었다는 회포를 말하고, 다시 둘만의 생활을 위해서 절을 빠져나갈 것을 간청했다. 상백은 처음엔 불제자(佛弟子)가 된 몸으로 도저히 그와 같은 짓은 하지 못하겠다고 강경하게 거절을 했으나 운선 아씨의 흐느낌과 호소에 마침내 마음이 변했다. 그리하여 그날 밤 두 남녀는 남몰래 보살사를 빠져 나와 청주성으로 향하던 중 항상 넘나들었던 '이정골고개'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 상백은 속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그 고갯길을 넘은 지 석 달도 되지 않아서 환속의 몸으로 고갯길을 넘게 되는 자신의 약한 의지를 개탄하면서 운선 아씨에게 앞으로 떳떳하게 살지 못할 바에야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며 정사(情死)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자 운선 아씨도 서로가 같은 신분이 아닌 이상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상백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새벽 마을 사람들은 중들이 넘는 고개에서 목을 매고 죽은 젊은 중과 아녀자의 시체를 발견하고 관가에 알림으로써 그들의 신분이 밝혀졌다.
  • 이에 보살사 주지 보현 스님은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고 그 고개를 중들이 왕래하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그리하여 옛 중들이 지나던 고개라고 해서 오늘날 그 고개를 '구중고개'[舊僧峙]라 하고, 새로 넘나드는 길목을 오늘날 '중고개'[僧峙]라 하는데 그 곳이 바로 현재의 용암동이다. 위의 지명 전설에 따르면 '구중고개'는 '舊僧峙' 즉 '예전에 중들이 넘어 다니던 고개'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에 기초한 해석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구중고개'의 '구중'은 한자 '九重'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구중'(九重)은 '구중 궁궐'이라는 표현에서도 보듯 어떤 대상이 겹겹이 이어진 모습을 나타낼 때 쓰인다. 고개가 몇 겹으로 굽이굽이 이어져 있어 '구중고개'라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이 고개는 아주 깊고 험준하다.
  • '구중'이라는 단어는 독자적으로 마을 이름으로도 쓰인다. 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의 '구중', 전북 김제시 봉남면 화봉리의 '구중'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구중곡', '구중골', '구중다리', '구중산' 등에서 보듯 지명의 선행 요소로도 적극적으로 쓰인다

둥그배미

  • '둥그배미'는 이정골 앞에 있는 들이다. '둥그배미'의 '둥그'는 '둥글다'의 어간 '둥글-'로부터 변한 것이고, '배미'는 '논배미'를 가리킨다. 따라서 '둥그배미'는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는 논배미'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둥그배미'는 논배미 이름이 아니라 들 이름으로 쓰인 것이다. '둥그배미'라는 논이 있는 들을 논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뒷말

  • '뒷말'은 이정골의 한 부분이다. 마을로 들어가면서 개울 우측에 있는 마을이다. '앞말'과 구별된다.

매봉(-峰)

  • '매봉'은 이정골 뒤에 있는 산이다. 봉우리가 매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전국에 '매봉'이라는 산 이름이 아주 흔한데, 대부분 '매봉'의 '매'를 '鷹'으로 보고 '매처럼 생긴 산', '매 사냥을 하던 산' 등으로 설명한다. 한편, '매'가 '山'을 뜻하는 일반 명사일 수도 있어 '매봉'을 그저 마을 가까이에 있는 산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사천동의 '매봉산'을 참조하라

문앞들

  • '문앞들'은 이정골 앞에 있는 들이다. '문앞'과 '들'이 결합된 어형이다. '문앞'은 그 자체로 '들'을 지시하기도 한다. 전국에는 '문앞'이라는 들 이름이 대단히 많다. 문 앞을 나서면 대체로 들이 펼쳐져 있기에 '문앞'만으로도 들 이름이 가능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문앞들'이라는 지명은 '들'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문앞'에 '들'을 첨가한 어형이다. '문앞'에는 '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논'(문앞논), '골'(문앞골), '보'(문앞보) 등도 있을 수 있으므로, '들'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문앞'에 '들'을 붙여 표현해야 했을 것이다. 전국에는 '문앞들'이라는 지명이 '문앞'이라는 지명보다 훨씬 많다.

앞말/아랫말

  • '앞말'은 이정골의 한 지역이다. '아랫말'이라고도 한다.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앞말'이나 '아랫말'은 마을이 이정골의 앞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뒷말'과 구별된다.

용정방죽(龍亭-)

  • '용정방죽'은 이정골에 있는 방죽이다. 용정에 있는 방죽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렁봉(-峰)

  • '우렁봉'은 이정골에서 동남쪽에 있는 산이다. 김수녕양궁장 위쪽에 있다. '우렁봉'의 '우렁'은 무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렁이'를 가리킨다. 산봉우리가 우렁이처럼 둥글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렁'은 '우렁봉'을 비롯하여 '우렁골', '우렁논', '우렁들', '우렁바위', '우렁산', '우렁터' 등에서 보듯 지명의 선행 요소로 적극적으로 쓰인다. 지형이 우렁이같이 생기거나, 그 지역에 우렁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이정골/유정골(有亭-)/유정리(有亭里)

  • '이정골'은 용정동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유정골'(有亭-), '유정리'(有亭里)라고도 한다. '유정골'과 '유정리'의 '유정'은 '有亭' 3)으로 이해된다. 마을에 실제 느티나무 정자가 있으므로 '有亭'이라는 이름이 근거가 있는 셈이다. '유정골'은 마을에 느티나무 정자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유정리'(有亭里)는 '골'을 '里'로 한자화한 지명이다. '이정골'은 '유정골'의 변형으로 간주된다. '유정'이 '이정'으로 바뀌어 '이정골'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정골'도 마을에 느티나무 정자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정골'이라는 지명이 전국에 여러 군데 존재한다

진사래들

  • '진사래들'은 이정골 문앞들 아래에 있는 큰 들이다. 지금은 개발 지역으로 묶여 있다. '진사래들'은 일단 '진사래'와 '들'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진사래'의 '진'은 '긴'[長]의 구개음화 형태이다. '사래'는 '이랑'의 뜻이다. 그러니 '진사래'는 '길이가 긴 이랑'을 뜻한다. '진사래'는 본래 '긴 이랑'이라는 뜻 이나, 지명에서는 논·밭·들·마을 등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물론, '진사래'는 '진사래골', '진사래등', '진사래밭', '진사랫보' 등에서 보듯, 지명의 선행 요소로 쓰일 때는 '긴 이랑'이라는 본래의 의미로 쓰인다. '진사래들'은 '긴 이랑이 있는 들'로 해석된다. 밭고랑이 아주 긴 들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농촌마을 오시는길

이정골마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