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래

함께 웃는 청주 든든한 이웃, 행복한 용암1동
우리동소개 동유래

용암동유래

  • 용암동은 본래 청주군 동주내면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용바위"가 있어서 '용바위골','용박골' 또는 용암리라 하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유현리를 병합하여 용암리라 명명하고 사주면에 편입하였다. 1963년 용암동으로 바꾸어 청주시에 편입하였다.

용정동유래

  • 용정동은 본래 청주군 사주내면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유정리, 구곡리, 용성리, 구하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정리라 명명하고 사주면에 편입하였다. 용정은 용성과 유정리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든 명칭이다. 1963년 용정동으로 바꾸어 청주시에 편입하였다.

용정동 지명 유래

  • 영바위
    • 아주 오래전, 울창한 수목으로 뒤덮인 이곳 암벽 사이에 있는 돌방을 찾아온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멀고 먼 북쪽 땅에서 영웅이 되기를 바라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있던 중, 어느 날 꿈에 도인이 나타나 남쪽 땅에 이으러 동쪽 산맥의 정기가 서남 사이로 힘 있게 뻗치다가 멎은 곳에 청벽수실이 있으니 그곳을 찾아가 바윗물로 몸을 씻고 7년 간을 수행하면 감히 장수가 되어 날개를 얻고 천하를 재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그는 산수를 찾아 5년 동안을 해맨 끝에 겨우 꿈에 계시받은 청벽수실을 찾기에 이르렀다. 무사는 크게 기뻐하며 돼지를 잡아 하늘에 제를 올리고 숙배한 후에 몸을 깨끗이 씻고 동굴로 들어갔다. 그러나 동굴 물웅덩이에는 이미 용한마리가 도사리고 앉아 승천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무사는 크게 놀라고 또한 실망한 나머지 동굴 밖에 나와 청벽을 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자 한 도인이 나타나 "수실을 빼앗긴 것은 분한 노릇이나 아직도 희망은 남아 있으니 낙담하지 말라"하고 위안한 뒤에, "용이 승천하지 못하도록 문밖에 기다리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용을 죽인다면 그 정기를 빼앗을 수 있다 라고 일러주었다, 이말을 들은 무사는 동굴 밖에서 장검을 잡고 용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지 꼭 백일째 되던 날 새벽 갑자기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리며 마른 하늘에 번개와 천둥이 울리면서 벌안간 무서운 폭우가 쏫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넋을 잃은 무사가 정신을 가다듬고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에는 이미 일곱 색 무지개를 안고 용이 승천을 하고 있었다.
      무사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한탄하고 동굴에 뛰어들어가 바위를 치면서 애석함을 달래다가 어디론지 가버리고 말았다. 그때 무사가 발을 굴러 찼던 자리에 음푹하게 발자국이 남게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을 후세 사람들이 장수 발자국이라 하고, 그 청벽수실을 용이 오랫동안 승천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용바위" 또는 "용물웅덩이"라고 하며, 근처 마을을"용바위골(용박골)"이라 하여 오늘에 전한다.
      지금도 용박골에 살고 있는 일부 주민들은 용이 은거하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서 그 영험을 얻기 위해 해마다 음력정원보름이면 목욕재계하고 이곳에 시루떡을 놓고 치성을 드리고 있다. 한편, 용이 하늘로 올라가자 무사가 그를 잡아 죽이지 못함을 분하게 여기로 발을 굴러 바위에 발자국을 남긴 뒤 용물웅덩이에 빠져 죽었다는 설도 있다.
  • 구중고개/이정골고개
    • 조선 중엽 광해군때, 청주 고을에 낙향한 한양 벼슬아치 가운데 호조참판을 지낸 이참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외동딸 운선은 그 집 하인으로 일하는 상백이라는 젊은이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으나, 양반이라는 지체 때문에 감히 의중을 전하지 못하고 상사 지경에 빠졌다. 마음의 병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면서 헤어날 길이 없는 운선 아씨는 마침내 말못할 고뇌를 안고 병석에 몸져 눕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참판은 의원을 불러 병맥을 살피도록 하고 무당판수를 불러 병마를 쫒도록 하는 등 병 고치는 데 최선을 다했으나 백약이 무효러 운선의 병은 조금도 회복되지 않았다.
      이때 경기도 용인에 명의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팜찬은 자초지종을 소상하게 적은 서선을 상백하인에게 들려 그 명의를 초청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사슬을 안 운선은 동구 밖 성황당 있는 곳에서 상백을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스스로가 앓고 있는 병세가 다름 아닌 상백으로 인한 상사병이라는 것을 밝히고 함께 도망가서 살자는 뜻을 전했다. 운선 아씨로부터 사연을 고백받은 상백은 크게 놀라서 자기와 같은 미천한 하인놈하고 그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양반의 손에 죽도록 만드는거외에 아무 성사도 없다고 하며, 그 길로 혼자 도망을 쳐 용바위골 낙가산 기슭에 있는 보살사로 들어가 불가에 귀의하기로 결심했다.
      이때에 보살사 주지승 보현스님은 상백의 뜻이 일시적인 고뇌 탈피를 위한 흥분에서 온 것으로 간파하고 조용히 보름 동안을 객방에 둔 뒤 마음이 변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상백의 뜻이 초지일관 변람이 없자 마침내 길일을 택하여 삭발하고 정각이라는 법명을 내려주어 수도의 길로 인도했다.
      그러던 어느날 주지스님을 따라 시주를 나온 상백은 공교롭게 청주성에 들어와 때마침 연인탐색하고 있던 운선 아씨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토록 병이 되도록 상백을 찾고 있던 운선은 그날밤 보살사 수행방을 찾아가 상백에게 그 동안 보고 싶었다는 회포를 말하고, 다시 둘만의 생활을 위해서 절을 빠져나갈 것을 간청했다. 상백은 처음엔 불제자가 된 몸으로 도저히 그와 같은 짓은 하지 못하겠다고 강경하게 거절을 했으나 운선 아씨의 흐느낌과 호소에 마침내 마음이 변했다. 그리하여 그날 밤 두 남녀는 남몰래 보살사를 빠져 나와 청주성으로 향하던 중 항상 넘나들이던 "이정골고개"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상백은 속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그 고갯길을 넘은 지 석 달도 되지 않아서 환속의 몸으로 고갯길을 넘게 되는 자신의 약한 의지를 개탄하면서 운선아씨에게 앞으로 떳떳하게 살지 못할 바에야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며 정사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자 운선 아씨도 서로가 같은 신분이 아닌 이상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는것을 알고 상백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새벽 마을 사람들은 중들이 넘는 고개에서 목을 매고 죽은 젊은 중과 아녀자의 시체를 발견하고 관가에 알림으로써 그들의 신분이 밝혀졌다.
      이에 보살사 주지 보현스님은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고 그 고개를 '구중고개'라 하고, 새로 넘나드는 길목을 오늘날 '중고개'라 하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용암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