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손병희

역사와 문화가 살아숨쉬는 북이
의암이야기 의암손병희
의암손병희 사진1

동학·천도교지도자, 독립운동가
초명은 응구(應九). 호는 의암(義菴). 본관은 밀양(密陽)
충청북도 청주(淸州) 출신
의조(懿祖)의 서자이다


1882년(고종19) 동학에 입교하여 2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그의 수제자로서 한말 천도교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선생은 22세때 동학에 입교했고 2년 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으로서 북접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의 정봉준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 등지로 피신함.

그 후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2세 교주에 추임하여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보성.동덕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에 열중하였으며, 1908년에는 교주 자리를 물러나 우이동에 은거하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 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경각심과 우리 민족 모두에게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이로 인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이듬해에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치료를 받다가 사망함.

천도교 3세교주 의암 손병희 - 東學재건 심혈 기울인 ’人乃天사상 실천가’ 동학과 천도교 지도자인 손병희(孫秉熙)의 본관은 밀양이다. 초명은 응구(應九), 도호는 의암(義菴)이며, 동학교인들은 성사(聖師), 천도교 제 3세 교주, 교종(敎宗) 의암성사 또는 후천황씨(後天皇氏)라고도 한다. 그는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주시 북이면 금암리 대주동에서 아버지 두흥(斗興)와 어머니 경주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2년 10월 5일 의암은 큰 조카 손천민과 접주 서우순 등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다. 그는 3년 동안 동학의 21자 주문을 매일 3만번씩 최소한 하루 15시간씩 외웠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신앙했다.

그는 1905년 12월 1일 [동경대전]의 ’도즉천도(道則天道)’를 인용하여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할 것을 선포하여 본래의 종교운동으로 돌아갔다. 이때 의암은 동학의 본지인 ’사람이 곧 하늘이라, 사람의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주창했다. 의암은 1906년 1월 5일 귀국해, 2월 1일 종령을 발표하고, 2월 16일에는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제정 반포한 후, 주문 청수(淸水) 시일(侍日) 성미(誠米) 기도 등 수도 조목 5관제(五款制)을 제정하고 각 부서를 설치하였다.

의암손병희 사진2

1918년에는 서울 경운동에 천도교 중앙교당 신축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여 일부를 독립자금으로 사용하였고, 특별기도와 심고(心告) 때에는 국권회복을 염원하였다. 1919년 일본 동경에서 유학생들이 주도한 2.8 독립선언을 접한 최린 등이 의암에게 교단이 앞장서 국내에서도 독립선언을 추진하자는 요청이 있었다. 이에 찬동한 의암은 천도교측 대표로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그해 1월 20일경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과 함께 독립운동은 대중화해야 하고, 일원화해야 하며, 방법은 비폭력으로 할 것 등을 합의하고 구체적 방법과 진행을 일임하였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한 민족 대표들은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해 11월 의암은 옥중에서 중풍으로 쓰러져 심하게 고생했으나, 일제는 그의 보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1920년 6월에는 뇌일혈이 재발했으나, 10월 30일 판결에서 의암은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정지 결정으로 1년 8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동대문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받았다. 1922년 5월 19일 의암은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6월 2일 위령식과 하관식이 거행되었는데, 유해는 우이동 봉황각 옆에 모셨다.

그의 논저로는 [수수명실록(授受明實錄)] [명리전(明理傳)] [천도태원설(天道太元說)] [무체법경(無體法經)] 등이 있다. 의암은 갑오동학농민전쟁, 갑진개화혁신운동, 3.1독립만세운동 등 개혁과 독립운동을 앞장서 주도한 혁신적 사상가이며, 민중을 이끈 훌륭한 민족지도자였다. 또한 그는 다음 세대를 책임질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애쓴 헌신적인 교육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암은 ’인내천 사상의 실천가’로서 동학혁명의 실패 후 흩어져 숨어있던 동학을 재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불세출의 종교지도자이다. 그는 천도교라는 교명을 선포하여 동학을 교단으로 재조직했고, 여러 저술을 통해 교리를 체계화했으며, 각종 제도를 확립하여 현대화 작업을 충실히 수행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