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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제리

오송읍 연제리를 소개합니다.

위치

연제리 사진

연제리는 읍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동은 만수리, 서는 정중리, 남은 봉산리, 북은 공북리와 접해 있 다. 동쪽 일부를 제외하고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산이 그리 높지 않아 미호평야에 연결되는 평야지대 라 할 수 있다. 마을은 낮은 구릉지로 둘러싸인 골짜기마다 형성되어 있으며, 각 마을의 앞쪽이 되는 남부에 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다. 가구는 약2,224호이고, 인구는 6,242명 정도이다.

연혁

蓮堤里(연못골, 연제동)는 본래 淸州郡 西江外一上面의 지역으로서, 연못이 있으므로 연못골 또는 연제동이 라 하였으며 모과나무가 있어 木瓜洞 속칭 모가올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조선 英祖代(1757~1765년경)에는 연제리와 分土上里, 九郞里, 顔洞里, 墻內里, 槐亨里로 나뉘어 있다가 正祖 13년(1785)경 墻內里가 墻內上里 와 墻內中里로, 九郞里가 九郞中里와 下九郞里로 분리되고, 分土上里가 없어져 蓮提里, 顔里, 墻內上里, 墻內 中里, 九郞中里, 下九郞里, 塊亨里 등 7개 마을이 되었다. 그후 憲宗代(1845년경) 蓮提里, 安東里, 墻內里, 分 土城里, 塊亨里, 九郞里로 조정되어 高宗代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직전에 다시 蓮提里, 墻內里, 石橋里로 분리되었다가,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蓮提里 墻內里 石橋里를 병합하여 연못이 있으므로 연정리라 하여 강외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담안(墻內), 분토골 곽동이 마을로 이루어진 l리와 돌다리(石橋) 마을의 2리 그리고 작은 분토골 새구래, 구렁태 초마골로 이루어진 3리로 분구되어 있다.

자연마을

  • 담안(墻內) : 연제리에서 중심되는 마을. 조선 중종때 밀양박씨 文度公 朴薰이 담을 치고 살았다는데 담의 안쪽 마을이라 하여 담안이라 한다.
  • 돌다리(石橋) : 담안 남동쪽에 있는 마을. 돌다리가 있었으나 연제방죽의 건설로 없어졌다.
  • 분토골 : 연제리에서 가장 큰 마을. 일명 큰분토골이라고도 한다. 옛날의 연제리와 안동리를 합쳐 지금은 분토골이라 한다.
  • 새구래 : 분토골 남서쪽에 있는 마을.
  • 작은 분토골 : 분토골의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 옛날의 分土上里. 마을의 형상이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 한다. 옛날의 연정리는 본래 이 마을 남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논으로 변하였다.
  • 초마골 : 분투골 북쪽에 있는 마을. 옛날의 九郞中里.
  • 구렁태 : 새구래의 서쪽 초마골 남쪽에 있는 작은 마올. 옛날의 下九郞里.
  • 곽동이(곽딩이) : 담안 마을의 북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옛날의 괴정리.

기타지명

  • 樂健亨 : 연제리 돌다리(石橋) 마을의 쇠대배기산에 1926년 朴準學 ·朴泳來 등이 세운 정자.
  • 연제방죽(돌다리방죽) : 돌다리 마을 옆에 있는 못. 1919년에 축조었으며 유역면적 630ha 제방길이 489rn, 제방높이 6.7m, 만수면적 23ha 총저수량 81만㎥, 몽리면적 538ha이다.
  • 연방죽터 : 작은 분토골 마을 앞의 있는 방죽터. 분토골에서 새구래로 가는 도로의 북쪽 논으로 옛날 밀양박씨의 종가집에 딸린 연못이었다.
  • 질마고개 : 분토골과 새구래 마을 사이의 고개.
  • 쇳대배기 : 낙건정이 있는 산.
  • 장고개 : 돌다리에서 조치원장으로 가는 고개.
  • 정문거리 : 담안 마을 앞에 있는 길. 조선 영조 34년(1758)에 세운 효자 金鳳魯의 정려가 있었으나 1970년에 강내면 탑연리로 이전하였다.
  • 約亨址 : 담안과 분토골 마을 사이의 구릉지 남단부에 있는 언덕. 조선 영조代에 세웠던 約亨이 있었던 터로 지금은 수백년 된 노송이 한 그루 서있다.
  • 통미 : 초마골 남쪽의 구렁태에서 공북리 대비쪽으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에 있던 동산. 소의 구유통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름지어졌으나 지금은 논으로 개간을 하여 없어졌다.
  • 興德山 : 돌다리 마을의 서남쪽에 있는 산.
  • 興德提 : 조선 후기에 있었던 提堰 지금의 연제(돌다리)방죽.
  • 마을회관(공회당) : 담안과 분토골 사이에 있는 연제리 1구의 마을회관.

집성

연제리 밀양박씨 中始祖 文度公 朴薰이 조선 中宗때 己卯士禍를 당하여 유배생활을 마친 후 中宗 28년(1533)에 이 마을로 낙향하여 정착한 이래 密陽朴氏의 집성촌이 되었다. 이밖에 水原白氏가 다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