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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모의제작과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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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사람과농경]연모의제작과사용
청동거울,석검,거친무늬거울

동검·동모를 비롯한 많은 청동기가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의 본격적인 사용시기인 원삼국시대 초기까지 한국식동검문화 전반에 걸쳐 제작·사용되었다. 청동기의 제작은 간단한 기술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채광·정련·용범제작·주조·보수 등 가장 분업적인 전문기술의 존재를 고려해야 할 분야이며, 이 중 합금을 만드는 금속에 대한 정련기술과 제품을 부어내는 주조기술이 가장 힘들고 중요한 부분이다. 아직까지 원광(原鑛)의 채굴 및 정련과 관련된 기술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청동기의 성분과 제작기술 및 보수기법에 관한 것이 일부 알려져 있을 뿐이다.

韓國靑銅器의 成分

청동기의 제작에는 합금을 만드는 금속들의 광석채취가 가장 먼저 필요하다. 청동기를 만드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성분은 동(銅)과 석(錫)이며, 이밖에도 재질을 개선하기 위해 연(鉛)과 아연(亞鉛)이 합금재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工人들은 원료로서 공작석(孔雀石)·석석(錫石) 등의 광석 이외에도 감로석(爐甘石)·백연광(白鉛鑛)·방연광(方鉛鑛) 등의 광석을 찾아내어 채굴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역사시대의 기록이지만 「동국여지승람」에는 다섯 가지 금속(금,은,동,철,연) 중에서 ‘동’이 제일 많이 산출된다고 되어 있어 동광(銅鑛)이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의 연(鉛)·석(錫)·아연(亞鉛) 산지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어 채광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선사시대의 광산유적은 발견된 바 없어 채광기술에 관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합금을 하기 위해서는 각 광석을 따로 정련한 뒤 적절한 비율로 섞어서 사용한 것으로 믿어지는데, 이것은 한국식동검 등의 무기류의 성분분석에서 보이는 일정한 비율에서 알 수 있다. 합금비율에 따라 제작된 청동기의 성질이 달라지게 되는데 대체로 견고성은 석(錫)이 19%일 때 가장 높고 그 이상이 되면 깨지기가 쉽다.

이들 청동기의 성분분석 결과를 통하여 보면 한국식동검은 대체적으로 평균 동(銅) 79.2%, 석(錫) 13.4%, 연(鉛) 6.8% 정도의 조성비를 가지고 있으며, 동검 이외의 의기, 동경, 장신구 등에서는 동(銅)의 비율이 많이 떨어져 평균 59.65%, 석(錫)은 늘어 22.12%, 연(鉛)은 7.35%로 비슷하며, 아연(亞鉛)은 미량부터 24%까지 보이고 있다.

이러한 조성비율을 보면 제품의 특성을 고려해 경도성, 내여성, 주조성을 높이기 위한 성분배합이 적절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동검의 경우에는 동(銅의) 양이 많고 거울과 같은 의기류에는 빛의 반사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석(錫)이 많이 들어있는데, 이러한 점은 합금술의 원리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국 청동기들과 비교해보면 동(銅)의 함량이 적은데 비해 석(錫)과 연(鉛)의 함량이 많은 편이며 아연이 들어간 아연-청동의 존재가 주목된다. 아연을 넣게 되면 용융시 유동성을 좋게 하며 적은 양의 석(錫)을 넣고도 같은 조직 경도 및 내식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석(錫)이나 연(鉛)보다 산출량이 많은 한국에서는 아연-청동이 일찍부터 제작되었던 모양이다. 특히 송산리유적 출토 동부(銅斧)의 경우는 성분 분석 결과 아연의 함량이 24.5%나 되고 그밖의 초도 출토 장신구와 송산리 출토 정문경에도 아연의 함량이 많은 것으로 확인되어 아연이 거의 들어 있지 않은 중국청동기와는 계통이 달랐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실험에 의하면 인공적인 조작이 가해지지 않는 한 청동에 1.0% 이상의 첨가원소가 섞일 수 없다고 하므로 당시에 이미 청동의 질을 높이기 위한 합금법이 개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가니

광석에서 광물을 가려내거나 금속을 용해하기 위해서는 도가니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선사시대 도가니의 확실한 예는 확인된 바 없고, 삼국시대 이후에 속하는 도가니만 발견되고 있다. 외국의 예를 통해보면 청동기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형태나 재질의 변화가 거의 없이 토제 도가니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도가니도 삼국시대 이후 것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시대 도가니를 통해 청동기시대 도가니를 추정하여 보면 도가니는 토제이며, 50~60cc 정도의 주액을 담을 수 있는 소형의 것들이 많다. 태토는 점토에 모래를 섞은 거친 것이 대부분이며 기벽과 바닥의 두께는 일반 토기류와는 달리 두텁다.

도가니의 형태는 대체로 다섯 가지 종류가 보인다. I유형은 저부가 둥글고 높이에 비해 구연의 폭이 넓은 완형으로 구상의 주구가 달린 것, II유형은 저부가 둥근 컵 모양으로 구상의 주구가 달린 것, III유형은 저부가 첨저인 원추형으로 주구가 없는 것, IV유형은 전자와 비슷하나 첨저의 끝부분에 돌기가 튀어나와 있고 주구가 있는 것, V유형은 저부가 평저인 컵모양의 것이다. 이러한 도가니의 형태는 영국,스웨덴을 포함한 서양 고대의 도가니형태와 유사하며 크기가 작은 점에서도 공통성이 보인다. 이에 비해 고대 중국의 도가니는 양동이 형태의 것과 밑바닥이 좁은 평저이며 기신은 하부가 좁고 상부가 넓게 퍼진 소위 투구를 뒤집어 놓은 형태의 것들이 많으며 크기에 있어서도 대형이 많다.

주형(鑄型)

청동기를 주조하기 위해서는 주형이 필요하기 때문에 용범의 출토는 현지에서 직접 주조가 이루어졌다는 확실한 자료가 된다. 용범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발견되고 있는데 석범은 거의 모두가 활석제이며, 이밖에는 송국리주거지에서 발견된 편암제의 것이 1점 알려져 있을 뿐이다. 토범도 많이 사용되었다고 믿어지나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용범은 표면을 편평하게 다듬은 후 만들고자 하는 형태를 조각해서 제작하게 되는데, 거울·낚시바늘·동추 등과 같이 단합범으로 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이 같은 형태를 가진 것 2매를 합하여 사용하는 쌍합범의 것이다.

용범의 대부분이 활석으로 만들어진 것은 돌이 무르기 때문에 조각하기가 용이하고 주조할때 터지지 않아 반영구적이며, 표면이 매끄럽기 때문에 주조물 표면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유리한 점에서 연유하는 듯 하다. 이러한 활석제 용범은 중국에서도 요녕식동검문화와 관련이 있는 중국 동북지방의 적봉(赤峰)·요양(遼陽)·여대(旅大)·당산(唐山) 등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는 주로 토범이 제작되었고, 일본의 용범은 대다수가 사암제이다. 토범의 경우는 주액주입구와 함께 가스가 빠져나가는 구멍을 반드시 만들어주어야 하며 또한 한번밖에 쓰지 못한다. 사암제의 것은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번 사용하기가 힘들며 자주 보수해야하는 불편이 있다. 이에 비해 활석제 용범은 가스구멍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고 계속해서 주조물을 부어내도 손상을 입지 않기 때문에 유리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청동제품 중 동범제품은 발견된 바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 한 용범에서 여러 개의 제품이 주조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합범으로 사용되는 용범의 측면에 단선으로 눈금이 새겨져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용범 2매를 결합할 때 용범이 전후좌우로 어긋나지 않고 정확하게 합쳐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고안이다. 주액을 주입하는 탕구가 명확한 것은 맹산(孟山) 출토 조문경 용범과 장천리 출토 동검 용범 등을 비롯해 여러 점이 있으나, 동검·동부·동과(銅戈)·동모용범 등은 영암 용범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용범이 불에 달구어진 흔적으로 보아, 경부나 공부쪽에 이들 보다 더 크게 점토로 만든 타원형의 주입시설을 만들어 붙여서 주액의 주입을 용이하게 하도록 하였다.

동부나 동모 또는 동탁·동영과 같이 공부가 있거나 중공의 것은 점토나 주물사 등으로 만든 내형이 필요하다. 내형은 외형에 닿지 않아야 주손(鑄損)을 입지 않기 때문에 공부를 만들 경우에는 영암 출토 용범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형의 형태를 위쪽(공부 쪽)의 폭이 넓고 아래쪽(인부 쪽)의 폭이 좁은 사다리꼴로 만들고, 주입구도 아래쪽으로 갈수록 좁게 만들어 내형이 밑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주입구의 한쪽 측면에는 두 개의 좁은 홈을 만들어 내형을 고정시키는 데 도움을 얻도록 하였다.

내형을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고정못[型持]이 주로 사용되었다. 고정못은 내형과 외형을 연결하여 고정시키게 되기 때문에 제품에는 이 부분에 주액이 닿지 않아 구멍이 나게 된다. 동탁의 신부(身部)나, 쌍두영의 봉상부에 나 있는 네모난 구멍은 바로 이러한 고정못자국이다.

동령류에서 보이는 절개구는 방울소리가 날 수 있도록 구멍을 낸 것이나, 고정못 설치를 겸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내형은 주조 후 모두 긁어낼 수 있도록 진흙이나 주물사로 만들지만 안계리 출토 입형동기에서 볼 수 있듯이 공부쪽만 내형을 긁어내고 삿갓부쪽은 그대로 남겨둔 것도 있다. 이것은 청동원료의 양은 줄이면서도 무게는 제대로 갖출 수 있게 한 고안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화순출토 쌍두영의 봉상부 내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내형이 주물사로 되어 있는 것도 있는데, 중공으로 만들 필요가 없는 봉상부를 중공으로 한 것은 역시 원료를 절약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용범의 새겨진 면들을 살펴보면 앞뒤 양면을 이용한 것이 있고, 한 면에 2~3개 제품의 형태를 새겨 하나의 용범으로 여러 개의 제품을 주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도 있다. 또한 낚시바늘이나 단추 용범에서 보는 바와 같이 2개의 형태를 상하 일직선상에 놓아 한 번에 2개를 주조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있다.

석제용범 이외에 토범도 많이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정문경의 경우 아직까지 석범이 발견된 바 없고, 양양 출토 동경에서 보듯이 문양을 고친 부분도 있어 토범으로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청동기 중 간두영, 쌍두영, 팔주영 등은 모두 1쌍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나 크기·문양으로 보아 동범의 것은 한 점도 보이지 않는다. 제작하기 힘든 동영류의 1쌍을 따로따로 제작한 점도 이들이 석범으로 제작되지 않고 토범으로 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토범이기는 하나 납형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생각되는 청동기도 있다. 이러한 것에는 의기유가 많은데 기면이 곡면을 이룬 검파형동기?방패형동기 등은 석범으로는 조각하기 힘든 문양들이 표현되어 있고 유환이 달린 반환형뉴에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납형에 의한 제작으로 믿어진다.

문양의 조각은 용범에 직접 새기거나 원형에 새겨지는데, 일부는 문양원장을 사용하였다고 믿어진다. 경주 죽동리 출토 간두영 1쌍의 예에서 보듯이 각기 크기에는 차이가 있으나 문양은 일그러진 형태까지 꼭 같아 문양도장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의기류에서 보이는 양각·음각 문양도 이러한 문양도장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양도장의 사용흔적은 요녕식동검문화의 T자형검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제품의 보수

주조 과정 중 주조기술이 부족해 용범이 잘못 제작되거나 그 밖의 결함이 있을 때는 문양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거나 동액이 닿지 않은 부분이 생겨 제품에 구멍이 나거나 그 일부분이 결실이 되는 경우가 생기며, 또한 제품이 제작된 후에도 사용하다 부러지거나 깨지는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보수를 하게 되는데 보수에는 지워진 문양의 보각(補刻)과 땜질이 대표적인 기법이다. 문양의 보각(補刻)이 확인된 실 예는 현재까지 전 황해도 신천 출토 요녕식동검의 검파 한 예 뿐이다.

땜질 후 갈고 보각(補刻)을 해서 땜질부위가 주위 문양과 어울리게 하였으나 정교하지 않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강원도 양양 출토 정문경에서 보이는, 문양이 고쳐진 부분은 보각(補刻)한 것이 아니고 주조 전 용범 자체의 손상된 부분을 수리한 것이다. 땜질은 구멍이 뚫린 것이나 부러져 파손된 것을 때워 고치는 것으로 보수 기법 중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어온 기법이다. 청동기시대 전반에 걸쳐 사용되었음은 물론 고려~조선초까지 계속되었다

. 땜질기법은 동검을 비롯해 동과, 동경, 차형두, 동환 등 거의 모든 동제품에 사용되었다. 땜질은 대체로 땜질부위의 이면(裏面)을 점토 등으로 막은 뒤 표면에는 땜질부위 주위에만 점토를 돌리고 동액을 부어 메운 뒤 표면을 갈아서 한 것이 많다.

땜질기법은 크게 4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일반적인 땜질법으로 구멍이나 파손된 부위만을 땜질하는 방법으로, 잘 보이지 않는 이면(裏面)은 땜질부위보다 약간 넓혀서 빠지지 않게 하였다.

둘째는 동환이나 동과집 등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땜질 부위의 한쪽 면을 톱니바퀴형상으로 더 깎아낸 뒤 땜질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구멍난 곳에 사용한 것이 아니고 대체로 동기의 한쪽 측면이 떨어져 나간 곳을 땜질할 때 사용한 것으로 톱니바퀴형상은 옆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고안이다.

셋째로 역시 동환에서 보이는 방법으로 조그만 반원형의 귀 형태를 가진 땜질로 역시 옆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고안이다.

넷째로 부러진 부위의 양쪽면에 조그만 수리공을 파서 연결하는 원두은(圓頭隱)장이음법이다. 이것은 부러진 것을 잇기 위한 방법이다.

이상의 기법 중 세번째 기법은 일본 청동기의 땜질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기법이다. 이밖에도 남성리 출토 검파형동기, 동서리 출토 나팔형 동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절단된 부분을 보수기법으로 수리하였고, 보수기법은 아니지만 못(rivet)을 박아 분리된 부분을 연결하는 방법도 있다. ※ 이건무, 1992, 「한국청동기의 제작기술」『특별전 - 한국의 청동기문화』 (국립중앙박물관·국립광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