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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속의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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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속의 농경, 옛날의 농경문화는 어떠했을까요? 우리 선조들의 그림 속에 나타난 옛날 농경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윤두서 조영석 김득신 김준근 김윤보 김홍도 윤용 이한철 신윤복 이방운 오명현 마군후 작자미상 농경문 청동기
윤두서 (尹斗緖: 1668-1715)
짚신 삼는 노인
짚신 삼는 노인
나물 캐는 두 여인
나물 캐는 두 여인
낮잠
낮잠
돌깨는 석공
돌깨는 석공
선거도
선거도
쟁기질과 목동
쟁기질과 목동
윤두서(1668-1715)는 우리 회화사상 조선 중기와 후기를 잇는 중요한 화가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이며,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로,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이다. 1693년 스물다섯 살에 진사가 되었으나 당쟁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포기하고 시서화로 일생을 보냈다.

1712년 45세 때에는 전라남도 해남의 연동(蓮洞)으로 낙향하여 그림과 글씨를 벗하며 보냈는데, 특히 인물화와 말 그림을 잘 그렸다. 그의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이 모두 그림을 잘 그렸고,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에게도 은연중 영향을 미쳐 실학적인 측면에서도 주목되는 인물이다.

현재 해남 종가(宗家)의 녹우당(綠雨堂)에는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 이외에도 다양한 학문적인 경향을 알려주는 지도며 그림첩 등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그의 소장품 중에는 남종 문인화풍의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씨역대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도 있어서 그가 남종화풍과 접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유명한 윤두서의 <자화상>과 <채애도> 등 60여 점의 소품으로 꾸며진 《해남윤씨가전고화첩》과 다수의 그림이 전하며, 저서로는 《기졸(記拙)》이 있다.
조영석 (1686 ~ 1761)
바느질 새참
바느질 새참
조영석 (1681-1761)
18세기 초 작품, 종이에 담채
새참
새참
조영석 (1681-1761)
18C 초 작품
종이에 담채
종이에 담채
22.5cm X 27cm 개인소장
젖짜는 어미소와 송아지
젖짜는 어미소와 송아지
말과 미동
말과 미동
수공선거도 (手工旋車圖)
수공선거도 (手工旋車圖)
말의 앞발에 편자 못을 박는 생동감이 넘치는 그림
말의 앞발에 편자 못을
박는 생동감이 넘치는 그림이다
종이에 옅은 채색
조영석 (1681-1761)
종이에 옅은 채색
23.5cm x 24.4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영석(1686-1761)은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로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자는 종보(宗甫), 호는 관아재(觀我齋)이다.

1713년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정3품 벼슬인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고, 사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748년에 숙종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에 감동으로 참가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기술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 하여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는 인물화뿐 아니라 산수화와 영모화도 잘 그렸는데, 윤두서(尹斗緖)의 경우처럼 조선 중기의 전통적인 화풍을 계승하면서 남종화법을 약간 가미한 화풍을 특징으로 한다. 일상적인 풍물을 소묘한 《사제첩(麝臍帖)》은 후대에 유행하게 되는 풍속화의 선구로서 주목된다. 문집으로는 《관아재고(觀我齋稿)》가 있다. 대표작으로는 <설중방우>와 <강상조어도>, <바느질> 등이 있다.
김득신 (金得臣 : 1754-1822)
귀시도
귀시도
김득신 그림
주막거리
주막거리
여러 풍속도를 한 화면에 복합하여 주변
풍경과 섬세하게 조화시킨 작품으로
주막과 대장간, 다리를 건너는 여행객,
논일하는 농부들을 함께 엮었다.
반상도
반상도
종이에 수묵 담채
27.5 cm x 33.5 cm
평양박물관 소장
김득신(1754-1822)은 조선 후기의 화가로서 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자는 현보(賢輔), 호는 긍재(兢齋)이다.

화원이었던 응리(應履)의 아들이며, 응환(應煥)의 조카이고, 동생인 석신(碩臣), 아들인 건종(建鍾), 수종, 하종(夏鍾) 모두 도화서 화원인 화원 집안의 화가이다. 1791년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데 이명기(李命基),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참여하였다.

풍속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도석인물화, 산수화, 영모화도 잘 그렸다.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풍속화에 산수를 배경으로 삽입시켜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표작으로는<야묘도추>와《풍속화첩》 ,<출문간월도(出門看月圖)> 등이 있다.
김준근 (金俊根)
신부연석 (新婦宴席)
신부연석 (新婦宴席)
'기산풍속화첩 (箕山風俗畵帖)' 중에서
김준근 (金俊根: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19세기 작품
종이에 채색
31.0cm x 38.7cm
개인 소장
쌍륙
쌍륙
'기산풍속화첩 (箕山風俗畵帖)' 중에서
김준근 (金俊根: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19세기 후반 작품
종이에 담채
18cm x 25.5cm
독일 함부르크 인류학박물관 소장
배경을 생략한 김홍도의 풍속화첩과 유사한 형식으로 화면을 구성
배경을 생략한 김홍도의 풍속화첩과
유사한 형식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투호
투호
현장 사생의 생동감이 없는 조선 후기
풍속화의 말기적 현상이 드러나 있다.
기물의 원근 작도와 의습 처리의 입체감,
가벼운 채색의 신선함 등을 통해
서양 회화의 영향과 근대 회화로의
형식적 시취를 느낄 수 있다
신부연석 (新婦宴席)
신부연석 (新婦宴席)
'기산풍속화첩 (箕山風俗畵帖)' 중에서
김준근 (金俊根: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19세기 작품
종이에 채색
31.0cm x 38.7cm
개인 소장
팔탈판
팔탈판
'기산풍속화첩 (箕山風俗畵帖)' 중에서
김준근 (金俊根: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19세기 후반 작품
종이에 담채
12cm x 25.5cm
독일 함부르크 인류학박물관 소장
한말의 풍속화가. 호 기산(箕山). 성장 배경은 알 수 없다. 1889년 경 부산에서 살 때 선교 사 J.S.게일을 처음으로 만났으며, 92년 게일을 따라 원산에 가서 한역 《텬로역뎡(天路歷程)》의 삽화를 맡아 그렸다.

그 외에도 19세기 후반 생업ㆍ놀이ㆍ형벌ㆍ의례 등 서민들의 생활모습과 민속을 담은 300여점의 풍속화를 남겼는데, 한국을 다녀간 학자나 선교사들을 통하여 서양에 전해졌다. 한국보다는 해외에서 더 잘 알려졌으며, 95년에는 독일 함부르크민 속박물관에서 그림이 전시되기도 하였다. 국내에는 숭실대학박물관의 풍속첩이 있고, 독일의 함부르크민속박물관 소장 《기산풍속도첩》이 있다.
김윤보 (金允輔 : 19세기 말-20세기 초반)
처가방문
처가방문
타작
타작
소작료납입
소작료납입
평양에서 활약했던 화가로 호는 일재(一齋)이다. 1914년 윤영기의 평양서화미술회(기성서화회)에 참여하여 후진을 양성하였고 1922년 선전에 입선 하였다.

평양에서 산수,인물,어해도 등으로 명성을 얻었고 관왕묘에 12폭 벽화로 [삼국지]주제의 그림을 그린 바 있다. 구한말부터 1930년대까지 활동한 김윤보의 풍속도는 평양감영을 중심으로 채집한 <형정도첩>과 세시 풍속을 담은 <풍속도첩>이 전한다. 구성이나 필치가 김준근의 화풍과 마찬가지로 퇴락된 형식미를 보여 준다.

인물묘사의 정확성이 떨어지나 김준근의 풍속도보다는 선이 직선적이고 비교적 회화적인 맛을 풍긴다 위의 그림은 23점으로 꾸며진 김윤보의 <풍속도첩> 中 세 장면이다. 김홍도 이후에 농촌 풍속도를 총정리해 놓은 작품이다. 특히 타작에서는 19세기 농민층 분해로 인해 지주층도 가벼운 노동이나마 직접 생산 활동에 참여해야만 했던 당시 실정을 반영하고 있다. 18세기 김홍도 ‘벼타작’의 양반 표정과 좋은 대조를 이루며 변화된 사회상을 보여 준다.
김홍도 (金弘道 : 1745~?)
기우도강도(騎牛渡江圖)
기우도강도(騎牛渡江圖)
이 작품은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20폭
가운데 한점으로 소잔등을 타고 넓은 개울을
건너는 사람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기와이기 Building a House
기와이기 Building a House
《풍속화첩(風俗畵帖)》에 속한 그림으로
종이에 그려진 것이다. 크기는 27.0×22.7cm로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이란 제목
으로보물527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조어산수도(釣魚山水圖)
조어산수도(釣魚山水圖)
큰 절벽 아래 개울가에서 한가롭게 낚시하는 두
사람을 소재로 하였다. 물살의 표현이 특징적이다.
씨름
씨름
《풍속화첩(風俗畵帖)》에 속한 그림으로
종이에 그려진 것이다.크기는 27.0×22.7cm
로《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이란
제목 으로 보물527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경작도(耕作圖)
경작도(耕作圖)
가는 풍경으로 소에 멍에를 걸고
쟁기질하는 농사꾼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벼타작 Theshing Grains
벼타작 Theshing Grains
《풍속화첩(風俗畵帖)》에 속한 그림으로
종이에 그려진 것이다. 크기는 27.0×22.7cm로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이란 제목
으로 보물527호로 지정되어 있다.
1778년 작품 | 비단에 옅은 채색
기우부신도(騎牛負薪圖)
기우부신도(騎牛負薪圖)
絹本淡彩, 25.5×35.7cm(간송미술관소장)
순박한 시골 아이 하나가 꼴을 한 짐지고 소등에
올라탄채 산길을 내려와 막 마을로 들어서고 있다.
대장간
대장간
(크기 90.0×42.7cm, 絹本彩色) 김홍도가
34세 때, 강희언 (康熙彦,1733~1782년경)의
집에서그린것으로<행려풍속도
(行旅風俗圖)> 의 한 장이다.
김매기(水耘·出)
김매기(水耘·出)
아득하게 펼쳐진 논을
배경으로두고 하반부에
김매기하는 11명의 사람
이 모습이 자연스럽고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타작(打稻樂趣)(Threshing Grains)
타작(打稻樂趣)(Threshing Grains)
김홍도가 34세 때, 강희언(康熙彦,
1733~1782년경)의 집에서 그린 것으로
<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의 한 장이다.
벼타작 하는 일상사를 따듯하고 해학적인
시각으로 뇨사하고 있는 김홍도의 대표작
(크기 90.0×42.7cm, 絹本彩色)
논갈이(춘일우경)
논갈이(춘일우경)
이른 봄 논갈이 하는 풍경
이다. 한 가족으로 생각되
는 농부가족의 건실한 삶
의 모습이 흐뭇하다.
길쌈
길쌈
1780년 경 작품으로 추정
종이에 담채
27cm x 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새참
새참
1780년 경 작품으로 추정
종이에 담채
28cm x 23.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자리짜기
자리짜기
1780년 경 작품으로 추정
종이에 담채
각 27cm x 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1745-1816 이후)는 자를 사능(士能), 호를 단원(檀園), 단구(檀丘), 서호(西湖)라 했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원 화가이다.

당대의 평론가이자 문인 화가인 호조참판 강세황(姜世晃)의 추천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와 왕세자의 초상을 그렸고, 그로 인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도 연풍 현감까지 지냈다.

그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한다. 김홍도는 풍속화를 잘 그리기로 일반에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남종화, 평생도, 신선도, 풍속화, 도석인물화, 화조화(花鳥畵), 진경산수, 초상화 등 전반에 걸쳐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산수화는 그의 예술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그의 산수화는 여백을 적절히 남기면서 대상을 압축하는 밀도있는 구도법과형상을 집약해서 표현해 내는 묘사력, 그리고 운치있는 운염법 등으로 김홍도의 산수화는 진경산수와 남종문인화가 하나로 만나는 높은 예술적 경지를보여주었다. 그가 이룩한 속화(俗畵) 양식은 같은 시대의 긍재 김득신, 혜원 신윤복에게도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후배들이 그대로 추종하여 그의아들인 긍원 김양기, 임당 백은배, 혜산 유숙, 시산 유운홍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의 산수도에서는 정선(鄭敾)이나 김응환(金應煥)의 영향이 다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는 실경을 소재로 단원법이라 부를 만큼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산수뿐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굵고 힘찬 옷주름과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없이 천진한 얼굴 모습 등도 특징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역시 풍속화이다. 그의 풍속화는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을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를 써서 익살스럽게 표현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말을 타고 가다가 꾀꼬리 소리에 멈추었다는 <마상청앵도(馬上廳鶯圖)><군선도팔곡병><총석정도> <도우도> <두보시의신선도> <군현도> <주상관매도> 와 한국적인 해학과 정취가 가득찬 25면으로 구성된《풍속화첩》 외에 여러 산수화첩이 있다.
윤용 (尹精 : 1708-1740)
18세기 초 작품, 종이에 수묵
18세기 초 작품, 종이에 수묵
27.5cm x 21.2cm - 간송미술관 소장
윤용(1708-1740)은 조선 후기의 화가로 자는 군열(君悅), 호는 청고(靑皐)이고, 본관은 해남(海南)이다.

윤두서(尹斗緖)의 손자이며 윤덕희(尹德熙)의 둘째 아들로 1735년에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서화(書畵)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술을 좋아하였으며 기품이 있고 맑은 성격에 용모는 단정하고 아름다웠다"고 전한다. 남아 있는 작품을 보면 그는 할아버지 윤두서와 아버지 윤덕희의 화법을 충실히 따른 것 같다.

그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나름대로의 화풍을 이룩할 충분한 여유가 없었던 듯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기지는 못하였다. 그의 그림에는 집안의 화풍을 계승한 흔적이 역력하며, 가법(家法)으로 정착된 남종화풍을 따랐고, 풍속화에서는 윤두서의 화풍을 연상케 하는 <나물 캐는 여인>이 있으며, 그 밖에 < 수하독서도(樹下讀書圖)> 등이 있다.
이한철 (李漢喆 : 1808-1880이후)
비단에 채색
비단에 채색
116cm x 31.5cm
동아대학교 / 박물관 소장
이한철 낙관
이한철 낙관
1808년(순조8년)에 안산이씨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字가 자상(子常), 호가 희원(希園) 희원(喜園) 송석(松石)이며 운재 이의양의 아들이다.

도화서 화원 출신으로 군수를 지냈다. 그는 원말4대가의 영향을 받아 山水 人物 折技에 모두 뛰어났으며 어진(御眞)을 그릴정도로 상류사회의 인정을 받았었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추림독서도(秋林讀書圖)」, 박원용 소장의 「계산쌍야도십이폭병풍(溪山雙羊圖十二幅屛風)」등이 있다.
신윤복 (申潤福 : 1758-19세기 초반)
단오풍정 (端午風情)
단오풍정 (端午風情)
'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에서
신윤복 (申潤福: 1758-19세기 초반)
1805년 이후 작품으로 추정
종이에 채색
28.2cm x 35.2cm
간송미술관 소장
비단에 수묵 담채
19세기 초 작품
비단에 수묵 담채
28.3cm x 19.1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본관 고령(高靈). 자 입부(笠父). 호 혜원(蕙園). 김홍도(金弘道) ㆍ김득신(金得臣)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로 지칭된다. 그는 풍속화뿐 아니라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산수(山水)와 영모(翎毛) 등에도 뛰어났다.

속화(俗畵)를 즐겨 그려 도화서(圖畵署)에서 쫓겨난 것으로 전해지며, 그의 부친 신한평(申漢枰)과 조부는 화원이었으나 그가 화원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전해진 작품에 남긴 간기(干紀)로 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처네를 쓴 여인》에 있는 1829년이 가장 하한인 바 대체로 19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화원이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해도 직업화가로, 당시 수요에 따른 많은 풍속화를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대표작으로는 국보 제135호로 지정한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이 전한다. 모두 30여 점으로 이루어진 이 화첩은 간송미술관 소장품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 전시를 통해 외국에도 잘 알려진 그림이다. 사회 각층을 망라한 김홍도의 풍속화와 달리 도회지의 한량과 기녀 등 남녀 사이의 은은한 정을 잘 나타낸 그림들로 동시대의 애정과 풍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탄금(彈琴)》 등 6점으로 된 화첩 또한 명품(名品)이다. 아울러 초상기법으로 그린 《미인도(美人圖)》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방운 (李昉運 : 1761-19세기 초반)
18세기 중엽의 작품
18세기 중엽의 작품
종이에 담채
25.6cm x 20.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본관 함평(咸平). 자 명고(明考). 호는 기야(箕野)ㆍ심재(心齋)ㆍ순재(淳齋)ㆍ순옹(淳翁)ㆍ기로(箕老)ㆍ심옹(心翁)ㆍ심로(心老) 등 여러 가지를 썼다. 그림 이외에 거문고도 잘 탔으며, 시문에도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가로서는 산수화와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전하는 작품들을 보면 특히 고사(故事)나 고시(古詩)를 소재로 다룬 것들이 많다. 그리고 거의 모두가 남종화법(南宗畵法)을 바탕으로 하여 담백한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으며, 그의 화풍은 간략화된 형태와 산뜻한 담채(淡彩), 짧은 선과 가는 점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윤곽선, 그리고 간략한 세필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대표작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빈풍도(ㆍ風圖)》,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청계도인도(淸溪道人圖)》,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망천심경도(輞川十景圖)》 등이 있다.
오명현
지게꾼
지게꾼
인물의 정확한 묘사를 위해 유탕과 엷은 담홍색의 밑선으로 조심스레 수저한 흔적이 보인다. 그런 탓에 엉거주춤한 자세, 얼굴 표정, 팔과 손, 무릎과 장딴지의 근육, 지게와 어깨띠의 무늬, 짙은 먹으로 균형을 잡은 모자와 짚신 등 실물 사생에 의한 설명적 의도가 짙다. 그리고 아래와 오른쪽 언덕의 나무와 잡풀은 담채와 먹의 선염 효과가 적절히 어우러져 있다.
허리띠 매는 취객
허리띠 매는 취객
괴팍한 품성의 인물을 대상으로 삼은 이 작품은 엄정하고 절제된 행동을 미덕으로 생각했던 양반 사회의 관행을 깨는 주제이다.
오명현은 윤용과 함께 18세기 초반, 조영석의 뒤를 이어 작품에 개성미와 현장 사생의 참신함을 잘 살린 화가로서 유명하다. 평양출신으로 자가 도숙(道叔)이고 호가 기곡 이라는 것 말고 출신이나 생애, 교우 관계, 작품 활동 등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오명현의 속화에는 현장 사생의 묘사 기법에 조영석의 영향이, 배경처리에는 조선 중기의 산수화풍과 조영석,이인상의 남종화풍이 함께 소화되어 있어서 풍속화다운 재미도 있으려니와 그의 작품은 풍속화의 양식적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놓인다.
마군후 (馬君厚 : 18세기-19세기)
촌녀채종
촌녀채종
1791년 작품
종이에 담채
24.7cm x 14.6cm
간송미술관 소장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백인(伯仁). 생애와 행적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인물과 영모(翎毛)를 잘 그렸으며, 특히 1851년(철종 2)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촌녀채종도 村女採種圖>는 시골에서 밭가는 아낙들의 풍속을 다루고 있어 주목된다. 이밖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수하승려도 樹下僧侶圖>와 <묘도 猫圖>,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쌍토도 雙兎圖> 등이 전하는데, 모두 필치가 예리하고 묘사력이 돋보인다.
작자미상 (作者未詳)
논갈이와 누에치기
논갈이와 누에치기
'경직도 병풍' 중에서
작자 미상 (作者 未詳)
19세기 중후반 작품
비단에 수묵 채색
149 cm x 44 cm
독일 게르트루트 크라센 소장
경직도병
경직도병
작자미상 (作者 未詳)
종이에 옅은 채색
121.8cm x 39.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패문재경직도
패문재경직도중에서
작자 미상 (作者 未詳)
비단에 채색
건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새참
새참
'경직도 병풍' 중에서
작자 미상 (作者 未詳)
19세기 중후반 작품
비단에 수묵 채색
149 cm x 44 cm
독일 게르트루트 크라센 소장
달구경
달구경
'경직도 병풍' 중에서
작자 미상 (作者 未詳)
19세기 중후반 작품
비단에 수묵 채색
149 cm x 44 cm
독일 게르트루트 크라센 소장
누에알 씻기
누에알 씻기
'패문재경직도' 중에서
작자 미상 (作者 未詳)
1696년 동판
33.5 cm x 23.4 cm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패문재경직도
패문재경직도중에서
작자 미상 (作者 未詳)
1696년 동판
33.5 cm x 23.4 cm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세 잠 재우기
세 잠 재우기
'패문재경직도' 중에서
작자 미상 (作者 未詳)
1696년 동판
33.5 cm x 23.4 cm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종자 담그기
종자 담그기
'패문재경직도' 중에서
작자 미상 (作者 未詳) 동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농경문 청동기
청동기에 선조(線彫)
청동기에 선조(線彫)
7.3cm x 12.8cm
국립중앙박물관
'농경문 청동기'는 대전 괴정동의 석곽묘에서 다른 청동기와 함께 출토된 것으로 집 모양 같기도 하고 방패 모양 같기도 한데,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윗부분에는 여섯 개의 구멍이 있고, 그 구멍을 이용해 매달아두고 사용한 듯 구멍의 윗부분이 닳아진 흔적이 있으며, 한쪽 면에는 둥근 고리가 달려 있다.

이 청동기에는 농사를 짓는 장면이 새겨져 있어서 매우 주목된다. 뒷면에는 밭을 갈고 있는 농부 한 사람과, 괭이로 땅을 파고 있는 모습, 그리고 키같이 생긴 것을 들고 있는 사람과 망을 씌운 항아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는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거두어 저장하는 농사의 장면을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리가 달린 앞면에는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서 솟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추측되며, 농사와 관련된 의식에 쓰이던 것으로 생각되어 이 청동기의 쓰임을 짐작하게 한다.